왼손잡이두목
love is wildfire / 1 / 20251020
둘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건 은행에서부터였다.
창구 직원을 앞에 두고 어떤 순서로 업무를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고, 이어 방문한 무기상에서 대량으로 맡길 무기 수리에 대한 견적을 받고 있는데 옆에서 발렌타인이 끼어들어 고치느니 새로사겠다 어쩐다 지껄이는 탓에 또 한 차례 실랑이를 벌였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릴 정도의 소란이었다.

본래라면 이자의 옆자리는 발렌타인이 아닌 다른 이의 몫이어야 했다.

단델리온이거나, 아니면 단델리온의 또 다른 심복이자 이자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차차라던가... 그녀가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 쯤은 말 한마디 없이도 완벽하게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출산 이후 몸이 약해진 차차가 상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면서 차차와 해왔던 일을 단델리온과 처리하게 됐고, 단은 대부분 이자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잡음이 없었다.

그러나 단델리온이 부재 중인 지금, 이자의 곁에 남은 건 믿음직한 동료 대신 통제 불능의 애송이 하나뿐이었다.

둘의 성격은 정말로 맞지 않았다. 발렌타인은 통제하기 힘든 즉흥적인 인간이었고, 이자는 매사 계산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발렌타인의 건방진 태도는 이자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자는 제법 발렌타인을 봐주고 있었다. 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녀석이 다소 무례하게 굴어도 이자는 참을성있게 일일히 설명해가며 상대해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을 돌보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고, 무엇보다 발렌타인이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 이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강가에서 사경을 헤매며 떠내려오던 녀석을 직접 건져 올린 것도 이자였다. 자신이 살려낸 생명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연고를 잃은 그 모습에서 제 처지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자는 발렌타인을 돌보는 일을 자처하며 제 옆에 두는 쪽을 택했고, 결국 이런 사단을 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자가 답답하다는 듯 따지다 말고 문득 어딘가를 응시했다. 발렌타인이 고개를 돌려 이자의 시선을 따라가자 저편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섯 명. 모두 덩치가 좋았다.

"이야, 이자 아니냐?"

앞장 선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마주치게 되네."

무척 친근한 말투였지만, "그때 우리끼리도 한 번 돌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떠나버려서 아쉽더라. 안 그래?" 입에 담는 내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뒤에 선 무리가 낄낄거렸다.

다가온 사람들을 의문 띤 얼굴로 보고만 있던 발렌타인이 아는 사람들이냐고 물으려고 이자를 돌아봤다가 이자의 표정이 좋지 못해서 그저 입만 꾸욱 다물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이자가 무리를 무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다. 발렌타인도 이자의 행동에 이유를 묻지않고 바로 뒤를 따랐다.

"어이,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라도 하지."

두사람의 등 뒤로 목소리가 따라왔다.

"여섯 명을 죽여놓고 할 말 없냐?"

그 소리에 이자의 걸음이 멈췄다. 이자가 반응하자 무리가 조롱하듯 비웃음을 흘렸다. 한 놈이 발렌타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옆에 있는 놈은 언제 죽일 거냐? 거기 형씨도 죽기 싫으면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저급한 도발에 이자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졌다.

화가났다. 정말로. 하지만 개가 짖는다고 해서 일일이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쪽에서 무기라도 꺼내든다면 대응은 해야한다. 저쪽은 다섯이고 이쪽은 둘. 발렌타인이 있으니 못 이길 싸움은 아니지만 마을 한복판에서 피를 보면 귀찮아진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저놈들은 분명 나중까지 쫓아올 놈들이었다.

도망칠까, 싸울까. 이자가 한참 저울질하는 동안 가만있던 발렌타인이 물었다.

"진짜 그럴 거야?"

상대편의 저급한 농담에 올라탄 발렌타인에게 이자가 곧바로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왜, 너도 내 방에 들어오게?"
"아니 별로 그런 취미는 없어서."

발렌타인이 손사래를 치며 이자의 속을 긁어놓았다. 신경이 곤두서있던 이자는 자기가 애를 상대로 뭘 하나 싶어서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둘을 가로막고있던 녀석들이 갑자기 위협적인 태도로 반원을 이루며 에워쌌다.

"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냐?"

"어이, 다치기 싫으면 이자를 두고 가."

발렌타인을 향해 말하는 것이었다.

"내놓으라고. 처음에 우리가 샀으니 이쪽에 소유권이 있어!"

이자는 눈쌀을 찌푸렸다. 안 좋게 나오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저급한 무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원래 이랬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그래서 그때도.

잊을 수가 없다. 잊을 수 있을리 없지.

자신을 강간한 여섯 명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 너희들이 무사할 수 있겠냐고 이자가 말했을 때 녀석들은 겁먹기는커녕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기분나쁘게 히죽거렸다. 한놈이 이자에게 다가왔다. 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준다며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거 두목이 허락한 거야."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이자는 스스로가 고깃덩이라고 느껴졌던 비참함과, 거처 안으로 숨어든 동료들을 죽이고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에 숨을 헐떡이며 그곳에서 뛰쳐나왔을 때를 기억했다. 달도 없는 한밤에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이 시렸던 감각을.

끓었던 피가 식었다.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괜히 마을에서 분란을 일으키기 싫었던 이자는 도망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미리 봐뒀던 도주로를 머릿속으로 되짚고 있는데 갑자기 발렌타인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건 안 되겠다."
이자가 깜짝 놀라서 발렌타인을 돌아봤다.

"대꾸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무시해."

이자가 다급하게 발렌타인을 향해 말했지만, 저쪽에서는 이미 킬킬대며 웃고 있었다.

"굳이 피를 보자는 건 아니지?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얼마면 되냐?"

"아- 얼마인지 나도 모르는데? 그거야말로 두목한테 물어봐야 돼. 얘는 우리 두목의 왼팔이라서."

장난스러운 태도로 난처한 척 뒷머리를 긁적이던 발렌타인이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근데 역시 안 되겠지."
발렌타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리 두목은 왼손잡이거든. 왼손잡이가 왼팔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시원하게 뽑힌 칼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이자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발렌타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됐고, 덤비라고."

검을 빼든 발렌타인이 저쪽 무리와 이자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자에게는 발렌타인의 뒷모습만 보였다. 검을 쥔 손, 곧게 편 어깨. 저쪽에서도 하나같이 험악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시선을 두고 있던 행인 한둘이 겁에 질려 자리를 떴다.

그순간 이자의 뇌리에 강가에서 발렌타인을 구했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왕실기사단의 망토가 떠올랐다.

이자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용병단끼리 싸움이야 흔한 일이지만, 문제는 발렌타인이었다.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잡혀가서 신원확인이라도 당하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시선을 굴리던 이자의 눈에 광장 저편의 큰 조형물이 들어왔다. 축제 전야제 준비로 세워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 구경하고 있었다. 저쪽으로 빠지면 인파에 섞여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자는 이미 전투 태세로 돌입한 발렌타인의 등을 퍽 하고 쳤다.

"야, 튀어."

바로 발렌타인의 팔을 낚아채 끌고 달렸다. 뒤에 남은 무리들쪽에서 욕설이 빗발쳤다.

"왜 말리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너... 아니다. 아무튼 엮여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너도 그냥 지나가."

곧바로 발렌타인의 억울함 섞인 투덜거림이 뒤따랐지만 이자는 제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묘한 감각에만 집중했다. 분명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서서 이자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는 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자가 이끄는 힘에 단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발렌타인은 자기가 다 이길 수 있는데 왜 도망쳐야 하냐는 둥, 그렇게 내가 못미더운거냐는 둥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이자가 정한 도주로를 군말 없이 함께 밟아나갔다.

두 사람의 뒤를 쫓던 거친 고함은 축제의 소란 속에 맥없이 파묻혔다. 축제준비로 분주한 광장의 인파와 거대한 조형물들이 하나의 벽이 되어 발렌타인과 이자의 뒤를 막아준 덕분이었다. 적들의 기세는 촘촘하게 들어선 사람들 사이로 힘없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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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두목
⠀⠀⠀⠀  이자,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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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살라맨더 단원들과 함께 마을의 축제를 즐기고 있던 발렌타인은 공연히 광장 입구 쪽을 힐끗거렸다. 축제는 삼가하는 편이라며 단원들을 배웅한 뒤 숙소로 돌아가는 이자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 자리에 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빈자리를 확인하는 발렌타인의 눈동자는 낮의 소란스러움과는 사뭇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나도 숙소에 남을 걸 그랬나.
이자가 없으니 왠지 모를 심심함에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저편에서 낮에 시비를 걸었던 놈들이 발렌타인의 눈에 들어왔다. 저쪽은 아직 발렌타인을 발견하지 못한 듯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자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던 발렌타인은 이자가 축제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반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부터 벌일 소동을 기어코 말렸을 테니까.

별안간 자세를 낮춘 발렌타인이 숨을 죽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들, 조져버리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단원들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며 술잔을 기울였다.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누구 말하는 건데? 누군가 묻자 발렌타인이 대답 대신 몇 자리 건너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쟤네 거기 아니야? 그 뭐, 북쪽에서 활동하는..."

"상관없지만 갑자기 왜?"

단원 일부가 흥미롭다는 듯이 발렌타인을 따라 몸을 낮췄다. 불꽃터지는 소리, 축제의 요란한 음악 소리나 주변 사람들의 소음이 광장을 채웠지만 발렌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작당모의라도 하는 모양새에 다른 테이블에 있던 틸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의무대소속으로 이자와 친한 사람이기도 했다.

"야야, 다른 병단이랑 시비 붙어서 좋을 거 없어. 이자가 안 가르치든?"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단원들이 그 말에 수긍하며 몸을 일으켰다. 핀잔을 들은 발렌타인이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임마."

"아니, 그게..."
발렌타인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까 낮에 이자랑 있을 때 마주쳤었는데, 괜히 시비 걸더라고. 이자도 별로 안반기는 눈치고."

틸이 술잔을 내려놓고 발렌타인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에 발렌타인은 공연히 발을 흔들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듣기로는... 이자가 이전에 있던 곳인 것 같던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즐겁던 테이블 위로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왁자지껄하던 웃음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리가 칼로 자른 듯 멎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 서서 서로의 눈치를 보던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발렌타인이 가리킨 테이블로 향했다. 단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축제의 들뜬 기운을 지워낸 지 오래였다. 그 무거운 침묵 사이로 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일부 단원들은 이자가 이 병단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말없이 술잔을 집은 틸은 아까 발렌타인이 턱짓했던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날아간 술잔은 정확히 북쪽 용병단의 테이블 위로 떨어져 박살났다. 사방에 술이 튀고 음식 위로 파편이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녀석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지만, 그녀는 이미 테이블을 박차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이 개자식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그게 신호탄이었다.

살라맨더 단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달려들었고, 축제의 흥겨운 음악 소리는 고함과 욕설, 주먹이 살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로 뒤덮였다. 테이블이 뒤집히고 술잔이 깨졌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결국 북쪽 용병단 녀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광장 구석으로 나뒹굴고 나서야 소동은 잦아들었다. 제일 먼저 달려들었던 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녀석들에게 침을 뱉었다.

​"앞으로 내 눈에 띄면 진짜 죽는다. 알았냐?"

​단원들이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하나둘씩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감보다는 할 일을 했다는 듯한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멀리서 축제의 불꽃이 터져 올랐다.

사실 이자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발렌타인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제 과거도 모르는 판에 남의 과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다만, 낮에 마주쳤던 놈들의 비열한 낯짝이 이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는건 알았다. 그냥 그게 거슬렸을 뿐이다.

축제의 불꽃이 터질 때마다 나동그라진 녀석들의 볼품없는 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발렌타인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꽤나 유쾌한 축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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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