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케이스
딜런은 단장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병단의 아이들은 그를 삼촌처럼 따랐다. 병단에 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정보상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병단에서 요청한 물건들을 조달해 오곤 했다. 몇 주에 한 번씩, 때로는 한 달에 한 번씩 병단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이 "삼촌!" 하고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딜런의 멋있고 나른한 분위기를 선망했다. 그는 늘 어디선가 먼지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고, 아이들은 그런 딜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날도 병단의 요청으로 물건을 사러 나갔던 길이었다. 용도는 명확했다. 여자아이를 한 명 데려와야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에 쓸 건지는 딜런도 굳이 묻지 않았다. 병단의 일이란 게 늘 그렇듯 복잡하고 더러운 법이었다.
노예상의 작은 가게는 습기와 악취로 가득했다. 딜런은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철창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노예상의 어깨 너머로 다른 철창 안을 보게 되었다. 거기 한 남자아이가 젖은 눈을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떠들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끌어 안고 벽에 기댄 채 딜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던 딜런은 결국 그 아이를 샀다.
형은 화를 냈다.
"미쳤냐? 여자애를 사오라고 했잖아!"
딜런은 담배를 입에 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애보다 쌌어.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얘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연기를 길게 뿜으며 덧붙였다.
"남자애라도 잘 키워서 쓰면 되지, 뭐."
사실 그런 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어쨌든 병 없고 건강하면 됐지, 이빨도 다 나 있고. 딜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이의 이름은 딜런이 지어줬다. 이자.
이자는 처음 병단에 왔을 때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디에나 텃세는 있는 법이다. 병단 안에서는 각자도생이 법칙이었다. 약육강식. 누구도 약한 아이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어른들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이곳의 규칙이었다. 딜런 또한 이곳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날도였다. 딜런은 자신을 반기는 아이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눈으로 이자를 찾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이자를 발견하면 딜런은 항상 천천히 다가가 그 옆에 쪼그려 앉곤했다.
"맞고만 있으면 계속 맞는다. 반응하지 않으면 괴롭힘을 그만둘 거라는 생각은 관둬."
언젠가, 딜런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면 말이야. 녀석들을 잘 살펴봐. 무리의 대장 격인 놈 하나만 제대로 제압하면 게임 끝이니까."
이렇게- 하며 딜런은 양손으로 허공을 붙잡고 박치기 하는 시늉을 했다.
이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딜런도 더 말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느리게 공중으로 올라갔다.
며칠 후, 딜런이 다시 떠나고 난 뒤였다. 또다시 괴롭힘이 시작되려던 순간, 이자는 무리의 리더에게 달려들었다. 단장의 아들인 피터였다. 체격 차이가 있었는데도 엎치락뒤치락하며 피터도 제법 얻어맞았다. 물론 이자 쪽이 더 많이 맞았다. 코피가 터졌고 입술이 찢어졌지만 이자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어른들이 말리러 와서야 싸움이 끝났다.
그 뒤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만은 계속 이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자가 뭐만 하면 빈정댔다. 둘은 줄곧 티격태격했다.
다른 아이들은 딜런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이자는 숱한 고민한 끝에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딜런."
묘하게 거리를 두는 호칭이었다. 딜런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딜런은 아이들 것을 사올 때마다 이자 것도 따로 챙겼다. 잘 세공된 단검이나 가죽 장갑 같은 것들. 슬슬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시끄럽게 이것저것 요구했지만, 이자는 그런 게 없었다. 그게 오히려 딜런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자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병단 아이들 중에서 담배를 제일 먼저 배운 건 이자였다.
어느 날 저녁, 딜런과 함께 병단 외곽의 담장에 앉아 있을 때였다. 딜런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이자는 그걸 빤히 보고 있었다. 딜런이 물었다.
"한번 빨아볼래?"
딜런은 자신이 피고 있던 담배를 이자의 입에 물렸다.
"폐를 써서 천천히 들이켜. 잠깐 머금었다가, 한숨 쉬듯 뱉어."
처음인데도 이자는 콜록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뱉어내는 이자에게 딜런은 자신의 담배 한 갑을 가죽 케이스 채로 건넸다. 그 뒤로 이자는 가끔 혼자 담배를 태웠다. 이자가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병단의 어른들이 말을 걸곤 했다.
"오, 이자. 담배도 할 줄 아냐?"
그렇게 어른들과 같이 담배를 태웠다.
병단 아이들도 그걸 봤다. 담배를 피는 이자의 모습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생각했다. 좆나 멋있다고.
딜런에게 담배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딜런은 아이들이 주문한 담배는 들여와주긴 했지만, 절대 같이 피워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부 콜록거리며 배웠다. 하지만 이자가 담배를 꺼낼 땐, 딜런도 자신의 담배를 꺼냈다. 그렇게 둘은 노을을 등진 채 말없이 담장에 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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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케이스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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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은 이자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이자는 머리도 좋고 몸도 건강했지만 아쉽게도 완력이 딸렸고,딜런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수색꾼이라도 할 수 있게 나무 오르기, 높은 데서 안 다치게 뛰어내리는 법, 벽 타기 같은 걸 가르쳤다. 백덤블링도 가르쳤다. 이자는 운동신경이 나쁜 편이 아니어서 금방 배웠다.
딜런이 손뼉을 치면 이자는 담장을 타고 올라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다녔다. 떨어질 때는 구르며 충격을 흡수했다. 딜런은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가끔 "좋아, 그렇게"라고 말했다.
남자아이들은 딜런이 이자한테만 유독 신경 쓰는 걸 질투했다. 여자아이들도 처음엔 질투했지만 이유가 달랐다. 얼마 안 가 딜런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이자로 갈아타거나 이자도 좋아하게 됐는데, 남자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이자가 특별히 뭘 하지도 않는데 거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지못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삼촌이 계속 챙겨주니까 그런 거라고 제멋대로 결론 내렸다.
딜런이 담배를 이자하고만 태우는 것도 그랬다.
그때만은 어른과 어울리는 이자를 선망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어른스러워 보이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들은 이자랑 자기들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 이자가 피터를 상대할 때만 아이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졌다. 피터는 계속 시비를 걸었고, 이자는 그때만큼은 받아쳤다. 이자가 싸움을 할 줄 알게 된 건 피터 탓이 컸다. 의외로 손이 먼저 나가는 것도 피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딜런이 와 있을 땐 그런 일이 없었다. 이자의 신경이 전부 딜런에게 쏠려 있어서 피터가 뭐라 빈정대건 발을 걸건 신경도 안 썼다. 딜런이 이자를 부르면 아예 이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물론 이자의 강함을 인정하고 친해지거나 따르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이자는 병단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승전 후의 술자리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떠들고, 어른들이 웃어댔다. 또래 아이들과 섞이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이는 이자에게 딜런이 평소처럼 다가와 옆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이자와 잔을 나눴다.
갑자기 저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들이 술게임을 하다가 벌칙으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키스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불쾌하다는 얼굴로 서로 맞닿았던 입술을 거칠게 옷소매로 훔치거나 바닥에 침을 뱉어대는 두 아이를 보며 딜런이 킥킥 웃었다.
"조만간 붙어먹겠군, 저 녀석들."
딜런이 문득 이자 쪽을 돌아봤다. "너는 관심없냐?"
"뭐를요?"
딜런이 저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자는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밀주를 마저 들이켰다.
딜런은 이자가 제법 인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동경이라는 감정을 몰라서, 이자를 다른 세계의 생물처럼 바라보거나 무시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달랐다. 유치하게만 느껴지는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이자를 좋아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티마도 사실은 너랑 키스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자가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에게 실례예요."
바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이자에게 딜런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실례했다는 표시였다. 그 제스쳐에 인상을 푼 이자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남자에요. 호기심은 당연히 있죠."
딜런은 가만히 이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뭐지, 나 취했나.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이자의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가르쳐줄까?"
이자가 대답 없이 의문을 띤 얼굴로 딜런을 쳐다봤다.
"키스."
딜런은 이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처음에 가볍게 겹쳤을 때 이자가 거부했다면 바로 떨어졌을 텐데 이자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기색만 있을 뿐이었다. 딜런이 혀를 내밀라고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 이자는 순순히 혀를 내주고 눈을 감았다.
떨어진 후 두 사람 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잔을 들었다. 딜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술 때문에... 어떻게 된 거 같다. 분위기를 탄 거 같아."
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담배도 당신한테 배웠는데요, 뭘."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이었다.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멋쩍은 듯 테이블과 하늘을 번갈아 봤다.
"한 번 더 하는 건... 싫어?"
"아뇨."
태연하게 돌아오는 즉답에 딜런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입과는 다르게, 손은 이자의 뺨을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싸왔다. 딜런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술을 겹쳤다.
이대로 두사람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딜런도 어차피 키스밖에 하지 않았고, 그 정도로 뭐 어떻게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냥 넘어가기엔 좀 그랬다.
난처해하는 딜런을 앞에 두고 이자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술 때문이라면서요."
피식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무는 이자를 보며, 딜런은 그때 자각했다. 이자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감정을.
그리고 피터가 그 테이블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건 아닌데 무심코 눈에 들어온 것이다. 피터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잡은 두사람의 거리감이 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맞춤 직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이어지는 두 번째 키스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피터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몰랐다.
여느 때처럼 피터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모처럼 받아들인 이자가 피터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우위를 선점한 피터가 이자를 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을 갈기기 위해 꽉 쥔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 문득 이자가 딜런과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라 그대로 멈췄다.
이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피터를 제압한 뒤 올라탔다.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한 대 갈겼는데, 이상하게도 얻어맞은 피터가 반격해오지않았다. 눈도 못 마주치고 뭔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이자도 맥이 빠졌다. 주변에서 말릴 필요도 없이 그대로 싸움이 중단됐다.
그날 밤 피터는 꿈을 꿨다.
아까 싸우던 풀밭에 이자를 눕혀놓은 채 꿈이 시작됐다. 싸움이 아니었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아랫도리를 맞붙이고 허릿짓을 하고 있었다. 피터가 당황해하고있는데 이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왔다. 홀린듯이 끌려간 피터의 목에 팔을 두른 이자가 교태롭게 웃었다.
"아까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거지?"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깼다.
그날 이후 피터는 이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어쩌다 싸우기라도 하면 그날 밤 피터 꿈에는 무조건 싸우던 장소에서 이자랑 배가 맞아 있었다. 늘 키스를 받자마자 깼다.
딜런이 피터의 감정을 알아챈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함께 있을 때,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조카녀석이 있었다.
"좋아하면 그냥 잘해주면 될 텐데,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는 거니?"
"제가 이자를 왜요?"
이자라고 말도 안했다 이녀석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집어삼킨 딜런이 피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조카의 얼굴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마음 한구석을 파고든 무언가가 이미 피터의 안에 또라이를 틀고 있었다.
"그래, 왜겠니."
딜런이 짧게 답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을 대꾸없던 피터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제가 이자에게 뭘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뭐, 그렇긴 하지."
삐죽 내민 입술이 다시 열렸다.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긴 하지예요. 삼촌은 이자랑 키스했으면서."
딜런이 모른척 멋쩍게 웃었다.
"아, 그때 보고 있었구나?"
피터는 입을 다물었다. 딜런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튼 이자한테 계속 그렇게 시비를 걸면 네 평판만 나빠져."
"이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자도 그렇지만, 지금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딴 거 필요 없어요."
피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전 다른 거 없고 그냥 이자가 짜증 나는 거예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조카를 묵묵히 지켜보던 딜런이 불쑥 말했다.
"이자가 아니라 내가 거슬리는 거 아니냐?"
"삼촌을 제가 왜요?"
"이자가 나를 좋아하니까."
딜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넌 나를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나는 거고."
피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찔린 듯 경직된 어깨, 숨을 삼키는 목젖의 움직임. 딜런이 그런 조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머리 좀 식히고 와."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나름대로 정답을 알려주고 감정을 자각하게 하고 등을 떠밀어준 것이니, 흐름만 잘 풀린다면 이자도 자신 같은 아저씨와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또래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딜런의 바램과 달리 피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삼촌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피터에게 이자를 향한 감정을 자각시킨 것은 좋은 시도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나빴던 사이를 되돌리기에는 계기도 없었고 시기도 이미 늦어버렸다.
시비가 도가 지나쳐 급기야 이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을 때, 피터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났다.
복귀한 딜런이 사정을 알게 되었고, 머지않은 날에 이자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판단하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이자가 조금 더 자랐다.
"피터자식이 자꾸 시비 걸어대서 짜증 나요. 당신이랑 친해서 더 그런 거 같아요."
딜런이 피식 웃었다.
"걔, 그거 너 좋아해서 그런 거야."
이자가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개소리예요. 내가 아니고 당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죠."
딜런이 낄낄 웃으며 연기를 후 뱉었다.
"그 나이대 사내녀석이 하는 생각이 뻔하지, 뭐. 너도 날 좋아하는데 시치미 떼고 있잖아."
이자가 멈췄다. 담배를 든 손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면 네 마음을 끝까지 모른척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쁜 어른이라서."
딜런은 담배를 지그시 끄고 일어났다.
"그때 했던 키스 다음을 알고 싶으면 따라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이자는 잠깐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딜런이 들어간 오두막의 문을 가만히 지켜봤다. 딱히 망설임 같은건 아니고, 담배에 불을 붙인지 얼마 되지않았다. 굳이 서둘러 담배를 끌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뿐.
이자는 신발 밑창에 담배를 지져끈 후 문을 열었다.
싱거운 이야기지만 선은 넘지는 않았다. 딜런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뭐에요. 가르쳐준다고 꼬셨으면서."
김이 새서 어이없어하는 이자의 머리를 투덕인 딜런은 침대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아직은 일러. 어차피 안 들어간다."
하지만 삽입을 제외한 그 외의 것들은 가르쳤다. 점차 이자의 얼굴에 색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눈치챘다. 아, 딜런이 드디어 했군.
어느 날, 딜런이 이자에게 물었다.
"다음에 떠날 때 동행하지 않겠냐? 슬슬 잡일할 시다가 필요해서."
"다른 애들도 있잖아요."
"똘똘한 녀석이 필요한 거야."
딜런이 이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간다면 네가 좋아. 네가 가겠다고 한다면 형한테는 내가 말해둘테니까."
잠깐 머뭇거리던 이자는 가고싶다고 말했다.
"그럼 다음 복귀 때 함께 가는 걸로 얘기해둘게. 준비하고 있어."
딜런은 단장인 형에게 이자를 정보상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기 때문에 잘 키워두면 분명 이득이 될 거라고. 형은 그러라고 했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자도 딜런을 잘 따랐다. 한편으로는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모두가 알고 있기도 했다. 흙내나는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난초처럼 성장한 이자를 건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단장의 동생인 딜런이 복귀만 하면 옆구리에 끼고 다니니 암묵적으로 주인 있는 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별 문제없었다.
딜런 또한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건 위험할까 봐 미루고 있었지만, 이자도 어느정도 컸고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딜런은 복귀를 하지 못했다. 어디 내란에 휘말려 죽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삼촌이자 사촌형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다들 울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었다.
이자는 딜런의 거처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늦췄다.
입구의 천 조각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자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안에는 딜런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담배 케이스. 가죽 장갑. 이자에게 주려고 사왔던 것들. 하지만 이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병단의 아이들은 그를 삼촌처럼 따랐다. 병단에 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정보상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병단에서 요청한 물건들을 조달해 오곤 했다. 몇 주에 한 번씩, 때로는 한 달에 한 번씩 병단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이 "삼촌!" 하고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딜런의 멋있고 나른한 분위기를 선망했다. 그는 늘 어디선가 먼지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고, 아이들은 그런 딜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날도 병단의 요청으로 물건을 사러 나갔던 길이었다. 용도는 명확했다. 여자아이를 한 명 데려와야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에 쓸 건지는 딜런도 굳이 묻지 않았다. 병단의 일이란 게 늘 그렇듯 복잡하고 더러운 법이었다.
노예상의 작은 가게는 습기와 악취로 가득했다. 딜런은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철창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노예상의 어깨 너머로 다른 철창 안을 보게 되었다. 거기 한 남자아이가 젖은 눈을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떠들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끌어 안고 벽에 기댄 채 딜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던 딜런은 결국 그 아이를 샀다.
형은 화를 냈다.
"미쳤냐? 여자애를 사오라고 했잖아!"
딜런은 담배를 입에 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애보다 쌌어.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얘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연기를 길게 뿜으며 덧붙였다.
"남자애라도 잘 키워서 쓰면 되지, 뭐."
사실 그런 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어쨌든 병 없고 건강하면 됐지, 이빨도 다 나 있고. 딜런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이의 이름은 딜런이 지어줬다. 이자.
이자는 처음 병단에 왔을 때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디에나 텃세는 있는 법이다. 병단 안에서는 각자도생이 법칙이었다. 약육강식. 누구도 약한 아이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어른들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이곳의 규칙이었다. 딜런 또한 이곳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날도였다. 딜런은 자신을 반기는 아이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눈으로 이자를 찾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이자를 발견하면 딜런은 항상 천천히 다가가 그 옆에 쪼그려 앉곤했다.
"맞고만 있으면 계속 맞는다. 반응하지 않으면 괴롭힘을 그만둘 거라는 생각은 관둬."
언젠가, 딜런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면 말이야. 녀석들을 잘 살펴봐. 무리의 대장 격인 놈 하나만 제대로 제압하면 게임 끝이니까."
이렇게- 하며 딜런은 양손으로 허공을 붙잡고 박치기 하는 시늉을 했다.
이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딜런도 더 말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느리게 공중으로 올라갔다.
며칠 후, 딜런이 다시 떠나고 난 뒤였다. 또다시 괴롭힘이 시작되려던 순간, 이자는 무리의 리더에게 달려들었다. 단장의 아들인 피터였다. 체격 차이가 있었는데도 엎치락뒤치락하며 피터도 제법 얻어맞았다. 물론 이자 쪽이 더 많이 맞았다. 코피가 터졌고 입술이 찢어졌지만 이자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어른들이 말리러 와서야 싸움이 끝났다.
그 뒤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만은 계속 이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자가 뭐만 하면 빈정댔다. 둘은 줄곧 티격태격했다.
다른 아이들은 딜런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이자는 숱한 고민한 끝에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딜런."
묘하게 거리를 두는 호칭이었다. 딜런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딜런은 아이들 것을 사올 때마다 이자 것도 따로 챙겼다. 잘 세공된 단검이나 가죽 장갑 같은 것들. 슬슬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시끄럽게 이것저것 요구했지만, 이자는 그런 게 없었다. 그게 오히려 딜런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자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병단 아이들 중에서 담배를 제일 먼저 배운 건 이자였다.
어느 날 저녁, 딜런과 함께 병단 외곽의 담장에 앉아 있을 때였다. 딜런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이자는 그걸 빤히 보고 있었다. 딜런이 물었다.
"한번 빨아볼래?"
딜런은 자신이 피고 있던 담배를 이자의 입에 물렸다.
"폐를 써서 천천히 들이켜. 잠깐 머금었다가, 한숨 쉬듯 뱉어."
처음인데도 이자는 콜록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뱉어내는 이자에게 딜런은 자신의 담배 한 갑을 가죽 케이스 채로 건넸다. 그 뒤로 이자는 가끔 혼자 담배를 태웠다. 이자가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병단의 어른들이 말을 걸곤 했다.
"오, 이자. 담배도 할 줄 아냐?"
그렇게 어른들과 같이 담배를 태웠다.
병단 아이들도 그걸 봤다. 담배를 피는 이자의 모습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생각했다. 좆나 멋있다고.
딜런에게 담배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딜런은 아이들이 주문한 담배는 들여와주긴 했지만, 절대 같이 피워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부 콜록거리며 배웠다. 하지만 이자가 담배를 꺼낼 땐, 딜런도 자신의 담배를 꺼냈다. 그렇게 둘은 노을을 등진 채 말없이 담장에 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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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케이스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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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은 이자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이자는 머리도 좋고 몸도 건강했지만 아쉽게도 완력이 딸렸고,딜런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수색꾼이라도 할 수 있게 나무 오르기, 높은 데서 안 다치게 뛰어내리는 법, 벽 타기 같은 걸 가르쳤다. 백덤블링도 가르쳤다. 이자는 운동신경이 나쁜 편이 아니어서 금방 배웠다.
딜런이 손뼉을 치면 이자는 담장을 타고 올라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다녔다. 떨어질 때는 구르며 충격을 흡수했다. 딜런은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가끔 "좋아, 그렇게"라고 말했다.
남자아이들은 딜런이 이자한테만 유독 신경 쓰는 걸 질투했다. 여자아이들도 처음엔 질투했지만 이유가 달랐다. 얼마 안 가 딜런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이자로 갈아타거나 이자도 좋아하게 됐는데, 남자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이자가 특별히 뭘 하지도 않는데 거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찾지못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삼촌이 계속 챙겨주니까 그런 거라고 제멋대로 결론 내렸다.
딜런이 담배를 이자하고만 태우는 것도 그랬다.
그때만은 어른과 어울리는 이자를 선망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어른스러워 보이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들은 이자랑 자기들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 이자가 피터를 상대할 때만 아이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졌다. 피터는 계속 시비를 걸었고, 이자는 그때만큼은 받아쳤다. 이자가 싸움을 할 줄 알게 된 건 피터 탓이 컸다. 의외로 손이 먼저 나가는 것도 피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딜런이 와 있을 땐 그런 일이 없었다. 이자의 신경이 전부 딜런에게 쏠려 있어서 피터가 뭐라 빈정대건 발을 걸건 신경도 안 썼다. 딜런이 이자를 부르면 아예 이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물론 이자의 강함을 인정하고 친해지거나 따르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이자는 병단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승전 후의 술자리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떠들고, 어른들이 웃어댔다. 또래 아이들과 섞이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이는 이자에게 딜런이 평소처럼 다가와 옆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이자와 잔을 나눴다.
갑자기 저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들이 술게임을 하다가 벌칙으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키스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불쾌하다는 얼굴로 서로 맞닿았던 입술을 거칠게 옷소매로 훔치거나 바닥에 침을 뱉어대는 두 아이를 보며 딜런이 킥킥 웃었다.
"조만간 붙어먹겠군, 저 녀석들."
딜런이 문득 이자 쪽을 돌아봤다. "너는 관심없냐?"
"뭐를요?"
딜런이 저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자는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밀주를 마저 들이켰다.
딜런은 이자가 제법 인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동경이라는 감정을 몰라서, 이자를 다른 세계의 생물처럼 바라보거나 무시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달랐다. 유치하게만 느껴지는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이자를 좋아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티마도 사실은 너랑 키스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자가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에게 실례예요."
바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이자에게 딜런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실례했다는 표시였다. 그 제스쳐에 인상을 푼 이자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남자에요. 호기심은 당연히 있죠."
딜런은 가만히 이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뭐지, 나 취했나.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이자의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가르쳐줄까?"
이자가 대답 없이 의문을 띤 얼굴로 딜런을 쳐다봤다.
"키스."
딜런은 이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처음에 가볍게 겹쳤을 때 이자가 거부했다면 바로 떨어졌을 텐데 이자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기색만 있을 뿐이었다. 딜런이 혀를 내밀라고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 이자는 순순히 혀를 내주고 눈을 감았다.
떨어진 후 두 사람 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잔을 들었다. 딜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술 때문에... 어떻게 된 거 같다. 분위기를 탄 거 같아."
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담배도 당신한테 배웠는데요, 뭘."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이었다. 딜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멋쩍은 듯 테이블과 하늘을 번갈아 봤다.
"한 번 더 하는 건... 싫어?"
"아뇨."
태연하게 돌아오는 즉답에 딜런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입과는 다르게, 손은 이자의 뺨을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싸왔다. 딜런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술을 겹쳤다.
이대로 두사람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딜런도 어차피 키스밖에 하지 않았고, 그 정도로 뭐 어떻게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냥 넘어가기엔 좀 그랬다.
난처해하는 딜런을 앞에 두고 이자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술 때문이라면서요."
피식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무는 이자를 보며, 딜런은 그때 자각했다. 이자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감정을.
그리고 피터가 그 테이블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건 아닌데 무심코 눈에 들어온 것이다. 피터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잡은 두사람의 거리감이 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맞춤 직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이어지는 두 번째 키스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피터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을 몰랐다.
여느 때처럼 피터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모처럼 받아들인 이자가 피터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우위를 선점한 피터가 이자를 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을 갈기기 위해 꽉 쥔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 문득 이자가 딜런과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라 그대로 멈췄다.
이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피터를 제압한 뒤 올라탔다.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한 대 갈겼는데, 이상하게도 얻어맞은 피터가 반격해오지않았다. 눈도 못 마주치고 뭔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이자도 맥이 빠졌다. 주변에서 말릴 필요도 없이 그대로 싸움이 중단됐다.
그날 밤 피터는 꿈을 꿨다.
아까 싸우던 풀밭에 이자를 눕혀놓은 채 꿈이 시작됐다. 싸움이 아니었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아랫도리를 맞붙이고 허릿짓을 하고 있었다. 피터가 당황해하고있는데 이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왔다. 홀린듯이 끌려간 피터의 목에 팔을 두른 이자가 교태롭게 웃었다.
"아까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거지?"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깼다.
그날 이후 피터는 이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어쩌다 싸우기라도 하면 그날 밤 피터 꿈에는 무조건 싸우던 장소에서 이자랑 배가 맞아 있었다. 늘 키스를 받자마자 깼다.
딜런이 피터의 감정을 알아챈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함께 있을 때,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조카녀석이 있었다.
"좋아하면 그냥 잘해주면 될 텐데,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는 거니?"
"제가 이자를 왜요?"
이자라고 말도 안했다 이녀석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집어삼킨 딜런이 피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조카의 얼굴에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마음 한구석을 파고든 무언가가 이미 피터의 안에 또라이를 틀고 있었다.
"그래, 왜겠니."
딜런이 짧게 답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을 대꾸없던 피터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제가 이자에게 뭘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뭐, 그렇긴 하지."
삐죽 내민 입술이 다시 열렸다.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긴 하지예요. 삼촌은 이자랑 키스했으면서."
딜런이 모른척 멋쩍게 웃었다.
"아, 그때 보고 있었구나?"
피터는 입을 다물었다. 딜런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튼 이자한테 계속 그렇게 시비를 걸면 네 평판만 나빠져."
"이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자도 그렇지만, 지금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딴 거 필요 없어요."
피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전 다른 거 없고 그냥 이자가 짜증 나는 거예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조카를 묵묵히 지켜보던 딜런이 불쑥 말했다.
"이자가 아니라 내가 거슬리는 거 아니냐?"
"삼촌을 제가 왜요?"
"이자가 나를 좋아하니까."
딜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넌 나를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나는 거고."
피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찔린 듯 경직된 어깨, 숨을 삼키는 목젖의 움직임. 딜런이 그런 조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머리 좀 식히고 와."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나름대로 정답을 알려주고 감정을 자각하게 하고 등을 떠밀어준 것이니, 흐름만 잘 풀린다면 이자도 자신 같은 아저씨와의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또래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딜런의 바램과 달리 피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삼촌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피터에게 이자를 향한 감정을 자각시킨 것은 좋은 시도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나빴던 사이를 되돌리기에는 계기도 없었고 시기도 이미 늦어버렸다.
시비가 도가 지나쳐 급기야 이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을 때, 피터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났다.
복귀한 딜런이 사정을 알게 되었고, 머지않은 날에 이자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판단하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이자가 조금 더 자랐다.
"피터자식이 자꾸 시비 걸어대서 짜증 나요. 당신이랑 친해서 더 그런 거 같아요."
딜런이 피식 웃었다.
"걔, 그거 너 좋아해서 그런 거야."
이자가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개소리예요. 내가 아니고 당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죠."
딜런이 낄낄 웃으며 연기를 후 뱉었다.
"그 나이대 사내녀석이 하는 생각이 뻔하지, 뭐. 너도 날 좋아하는데 시치미 떼고 있잖아."
이자가 멈췄다. 담배를 든 손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면 네 마음을 끝까지 모른척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쁜 어른이라서."
딜런은 담배를 지그시 끄고 일어났다.
"그때 했던 키스 다음을 알고 싶으면 따라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이자는 잠깐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딜런이 들어간 오두막의 문을 가만히 지켜봤다. 딱히 망설임 같은건 아니고, 담배에 불을 붙인지 얼마 되지않았다. 굳이 서둘러 담배를 끌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뿐.
이자는 신발 밑창에 담배를 지져끈 후 문을 열었다.
싱거운 이야기지만 선은 넘지는 않았다. 딜런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뭐에요. 가르쳐준다고 꼬셨으면서."
김이 새서 어이없어하는 이자의 머리를 투덕인 딜런은 침대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아직은 일러. 어차피 안 들어간다."
하지만 삽입을 제외한 그 외의 것들은 가르쳤다. 점차 이자의 얼굴에 색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눈치챘다. 아, 딜런이 드디어 했군.
어느 날, 딜런이 이자에게 물었다.
"다음에 떠날 때 동행하지 않겠냐? 슬슬 잡일할 시다가 필요해서."
"다른 애들도 있잖아요."
"똘똘한 녀석이 필요한 거야."
딜런이 이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간다면 네가 좋아. 네가 가겠다고 한다면 형한테는 내가 말해둘테니까."
잠깐 머뭇거리던 이자는 가고싶다고 말했다.
"그럼 다음 복귀 때 함께 가는 걸로 얘기해둘게. 준비하고 있어."
딜런은 단장인 형에게 이자를 정보상으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기 때문에 잘 키워두면 분명 이득이 될 거라고. 형은 그러라고 했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자도 딜런을 잘 따랐다. 한편으로는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모두가 알고 있기도 했다. 흙내나는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난초처럼 성장한 이자를 건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단장의 동생인 딜런이 복귀만 하면 옆구리에 끼고 다니니 암묵적으로 주인 있는 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별 문제없었다.
딜런 또한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건 위험할까 봐 미루고 있었지만, 이자도 어느정도 컸고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딜런은 복귀를 하지 못했다. 어디 내란에 휘말려 죽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삼촌이자 사촌형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다들 울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었다.
이자는 딜런의 거처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늦췄다.
입구의 천 조각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자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안에는 딜런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담배 케이스. 가죽 장갑. 이자에게 주려고 사왔던 것들. 하지만 이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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