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love is wildfire / 2 / 20251013
"그거 뭐, 꼭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일이야?"

발렌타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단델리온, 이자, 매그놀리아, 돌로레스까지. 다섯사람이 모인 자리는 발렌타인의 기억을 찾는 일의 진척을 확인하기 위한 자리였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발렌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로레스가 찻잔을 들어 살짝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이자가 돌로레스가 앉아있는 소파 뒤를 확인했다.
이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사실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생존본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자리를 지키고있는 매그놀리아부터 경계했다.

"어차피 가문도 다 해체됐다고 했잖슴까."

발렌타인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도 어디 있는지 모르고, 제 삶은 이미 살라맨더에 있는데 뭘 더 찾아야 하는지... 기억을 찾을 동기를 모르겠습니다."

아주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문제였다.

"그렇긴 해."

단델리온이 웃으며 거들었다.

"내 새끼지 뭘."

단델리온은 발렌타인을 좋아했다.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용병단의 단장이었지만 발렌타인에 관해선 그저 과보호하는 보호자에 가까웠다.

단델리온이 분위기를 읽지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살면서 눈치를 볼 입장이 되어본 게 몇 번이나 될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발렌타인이 주눅들지 않도록 편을 들어주고 싶었으리라.
이자를 사이에 두고 히죽대는 얼굴로 발렌타인과 단델리온이 장난스럽게 눈짓을 했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공범자들 같은 표정이었다. 두사람에겐 이상한 연대감이 있었다.

이자가 자기 차례라는 듯 한 팔로는 발렌타인의 옆구리를 찌르고 다른 손으로는 단델리온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양손 동시 공격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정신 차리라는 듯이 양쪽을 번갈아 눈짓하며 눈치를 줬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라고, 당신들 지금 왕자 앞이라고.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돌로레스가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한없이 가벼운 말투였다.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엇에 관해서? 이자가 의문띈 얼굴로 돌로레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잔이 다 비었네."
이어지는 말이 이런 엉뚱한 소리여서 더욱 의문에 빠졌다.

"찻주전자를 가져와주겠어?"

돌로레스가 발렌타인을 향해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 몸종은 대화를 못 듣게 하기 위해 방밖으로 내보낸지 오래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일어난 발렌타인이 시종들이 쓰는 협탁으로 가 따뜻한 찻물이 가득 채워진 찻주전자를 들었다. 손바닥만한게 생각보다 무거웠다.

돌로레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발렌타인에게 손짓했다. 발렌타인은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시종들이 하는 거처럼 직접 잔에 따라줘야하는건지 고민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걸? 따위의 생각을 하고있는데 돌로레스 쪽에서 먼저 손이 내밀어졌다.

돌로레스에게 찻주전자를 건낸 발렌타인은 문득 매그놀리아의 낯빛이 어둡다는걸 알았다. 평소라면 발렌타인의 시선을 눈치채고 바로 눈을 마주쳐 왔을텐데 지금은 왕자의 행동을 눈으로 쫓는데에 집중했다.

이자와 단델리온이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이동하면서 뚜껑이 열어본 돌로레스는 향이 좋네. 모처럼 잘 끓여졌는데 아깝네. 하고 중얼거렸다. 걸음이 소파에 닿자마자 돌로레스는 망설임없이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이자와 단델리온의 머리 위로 차가 쏟아졌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마치 정원에 물을 주는 것처럼 우아했다. 차가 뜨겁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발렌타인은 돌로레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발렌타인은 전장에서 수많은 적과 맞서 싸워온 사람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위축되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낸 돌로레스는 다 비운 티포트를 등 뒤로 내던졌다.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박살 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아—, 아끼던 거였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가 앉은 왕자는 마치 염려 깊은 스승처럼 말했다.

"그래, 네가 동기가 없어서 기억을 못 하고 있던 거였어. 전혀 생각 못 했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왕자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럼, 기억해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그게 동기가 되겠다. 지금처럼. 맞지?"
 
찻물에 젖은 단델리온과 이자에게로 향하는 시선에 발렌타인이 곧바로 얼굴을 구기며 돌로레스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손대기만 해봐. 가만 안 둬."

"음."

돌로레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동기가 생긴 거 같네."


────────────
⠀⠀⠀⠀⠀⠀⠀ 미아
⠀⠀⠀⠀⠀⠀발렌타인
────────────


발렌타인의 심기가 불편했다.
돌로레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네게 동기가 있건 없건 사실 별로 상관없어. 무조건 기억해내도록 해."

협박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운 말투였고, 단순히 종용이라기엔 너무 위협적인 말투였다. 왕자란 원래 그런 존재였다.

두 사람이 돌로레스의 몸종에게 받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는 동안 발렌타인은 불쾌한 기분에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자가 가만히 발렌타인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동기가 없는 건 네가 아무것도 몰라서야."

발렌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아예 없어서 그게 중요한 건지 안 중요한 건지도 모르는 거지."

이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네가 굳이 기억을 찾고싶지않다해도 상관은 없어. 그게 네 선택이라면."

이자도 단델리온 만큼이나 발렌타인을 아껴왔던 사람이다.

"다만 네가 기억을 찾게 된다면 최소한 앞으로 뭘 할게될때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날 거라고 봐."

"내가 찾겠다고 마음만 먹어서 찾아지는 거면 진작에 찾았지."

한결 누그러진 말투였다. 발렌타인은 경직되어있던 표정을 풀고 여느때처럼 이자에게 응석을 부렸다. 용병단에서 이자는 발렌타인의 선배이자 보호자였으니까. 그걸 지켜보던 단델리온이 두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천천히 생각하자. 상황을 정리해보는 거야. 여기 있는 기사님께서도 도와주겠다고 하시니까."

돌로레스는 나가면서 매그놀리아에게도 연대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쥐어패든 강간을 하든 어떻게든 기억나게 만들어.' 실로 왕자답지 않게 직설적인 명령이었다. 매그놀리아는 고요한 시선으로 발렌타인을 쳐다봤다. 뭔가 계획을 세우는 눈빛은 아니었다.


"당분간 디어관저에서 지내. 매그놀리아와 같은 방을 쓰고."

돌로레스의 명령이었다. 단델리온과 이자가 인질로 잡힌 셈이니 발렌타인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매우 효과적인 인질극이었다. 왕자는 협상에 능했다.

"굳이 기억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불편하다면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매그놀리아는 묘하게 거리를 두려는 투로 말했다. 자빠졌네. 전장 한복판에서, 전투가 끝난 것도 아닌데 투구를 벗겨놓고 입 맞춘 주제에.
하지만 발렌타인은 종종 자신을 바라보는 매그놀리아의 눈빛에서 애틋함과 그리움을 읽을 수 있었다.

한번은 발렌타인이 먼저 물었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그런 눈빛을 할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애틋한 사이였습니까?"

매그놀리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뭔가 말하려다 말고, 다시 말하려다 말고.

"제 착각이 아니라면."

그게 전부였다. 

매그놀리아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히려 쾌적했다. 매그놀리아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발렌타인도 굳이 붙임성있게 구는 타입은 아니었기때문에 어느샌가 각자의 영역이 생기고 그걸 암묵적으로 지켰다. 둘 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했다.

하지만 발렌타인 쪽에서 먼저 불편함을 느꼈다. 돌로레스가 왜 매그놀리아를 붙여놨는지 모르겠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자기가 뭘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건 여전하지만 침묵도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소음이 된다.

"대련을 하자."

발렌타인이 제안했다. 말하고 나서 생각했다. 이상한 제안인가? 하지만 매그놀리아는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훈련장에 도착한 두사람은 별다른 대화없이 바로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발렌타인의 검과 합이 맞을 때마다 매그놀리아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전장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상대의 강함만 생각하고 검을 잡았던 발렌타인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향수 같은 것이 밀려왔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런 감상도 잠시, 오랜만에 수준이 맞는 상대와 겨루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문득 깨닫고 보니 매그놀리아도 웃고 있었다. '즐거워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빈틈이 생겼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매그놀리아가 치고 들어왔다. 정확하고 빠르게. 발렌타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아차."

아깝다.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진 것이었다. 발렌타인 대신 검을 주워 건넨 매그놀리아가 이름을 불렀다.

"발렌타인."

잠깐 뜸을 들이던 그는 이내,

"내 얼굴 보면서 다른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하며 웃었다.
부드럽지만 슬픈 미소였다. 그리움이 가득한.

발렌타인은 분명 저 미소를 알고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명확히 떠올려보려 집중했지만 머릿속에 낀 안개가 개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답답하다못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머리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이마를 짚고 조금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는 발렌타인을 매그놀리아가 붙잡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땀에 젖은 뺨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차갑고 부드러웠다.

"햇볕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거 같군요."

흐려져가는 시야로 매그놀리아의 얼굴을 보기위해 애쓰며 발렌타인은 생각했다. '또 존댓말하네.' 또라고? 예전에도 이런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발렌타인은 그냥 다시 모르는 사이인 것 처럼 거리를 벌리려는 매그놀리아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빈정대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이 멀어져서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부축하는 손길을 마지막으로, 발렌타인은 정신을 잃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