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약속
죽음이라는 것은 때때로 허리띠 한 개와 검 한 자루로 증명되기도 한다. 계곡 바닥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확실히 발렌타인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체까지 발견되었다. 짐승이 먹다 남긴 것처럼 보였다.
왕실기사단의 망토자락이 찢어져 흩어져 있었다.
매그놀리아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고작 혼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무너져 내리는 탑의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고 하면 조금 나을까.
발렌타인이 추락한 직후 계곡을 샅샅이 뒤졌을 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때는 매그놀리아는 안심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살아서 도망쳤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안심해버리고 말았다. 안심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위태로운건지 매그놀리아가 미리 알았다면.
키스 디어는 직접 현장에 갔다. 손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대답이 되어 있었다. 처참하다는 것은 이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닐 거라고 키스가 말했지만, 매그놀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고백이 터져 나왔다.
"제가 발렌타인의 등을 쳤습니다."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매그놀리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발렌타인이 괜찮다고 했어요. 계곡이라서, 아래에 강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크게 안 다칠 거라고, 웃으면서..."
키스 디어는 그제야 이해했다. 배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젠틸러스의 아이를 탈출시키기 위해 보낸 손자가 그 아이를 배신한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배신은 없었다. 단지 믿음이 있었을 뿐이다.
"네 탓이..."
"같이 떨어졌어야 했는데."
키스가 말을 끝내기 전에 매그놀리아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떨어졌어야 했는데."
나도. 매그놀리아는 혼절하는 와중에도 후회만을 되풀이했다.
열병 이후의 매그놀리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말수가 줄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 시체. 그렇다. 시체가 가장 가까운 비유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 역설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는 계속되었다. 발렌타인의 등을 친 장면을 추격자들이 목격했기 때문에 디어 가문의 충성심은 의심받지 않았다. 오히려 포상을 받았다. 반역자의 자식을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돌아온 충직한 가문. 서사는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오직 발렌타인만이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매그놀리아는 밤마다 호숫가에 나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처음엔 다들 몽유병이라고 수군댔다. 호수 건너편에 있는 기사단 구역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늦은시간에 돌아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명령했던 돌로레스 보좌도 중단되었다. 손에서 검을 완전히 놓은 매그놀리아는 성을 나가 부지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매그놀리아는 죽음을 연습하는 사람처럼 살았다.
키스 디어가 죽었을 때 딱 한번, 매그놀리아는 국장으로 치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위해 얼굴을 비춘 이후로 일절 왕실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작위 수여식도 마찬가지였다. 수여장은 하인을 통해 전달되었다. 부지는 고요했다. 성기사가문답게 하얗게 빛나던 디어의 저택도 이젠 거의 무덤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돌로레스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다시 검을 잡아."
돌로레스가 오래전에 빼앗았던 검을 내밀었다. 어린시절 매그놀리아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다가, 돌로레스가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넘겨줬던 물건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매그놀리아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빈 잔 같았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네 할아버지와 약속한 게 있거든."
돌로레스는 매그놀리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혀를 찼다.
"근데 지금 네게 말해봤자 의미 없어 보이네."
전장에서 디어의 이름은 전설이었다. 이 불세출의 지휘관은 검을 쥐면 적이 수만대군이어도 부대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손에 펜조차 쥘 수 없음을 돌로레스는 알았다. 눈이 죽어 있다. 하지만 돌로레스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은 억지로라도 손에 검을 쥐어줘야만 했다.
키스 디어가 없는 지금, 신전을 견제할 자가 없었으니까. 돌로레스는 신전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지 못하게됐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적통 후계자인 첫째누나를 지지하던 신전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3남인 돌로레스 지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 뒤집듯이. 어딘가 이상하다는걸 느끼긴 했지만 든든했다. 신전이 뒤에 있다니.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누나가 사고로 죽었다. 사고. 편리한 단어다.
몇 년 후 삼촌인 디아즈 번이 모반죄로 고발되었다. 왕실 적통 후계자 암살 혐의로 증거는 완벽했다. 번은 모반자가 되었고, 그의 양자 발렌타인이 도주했다.
친구였던 매그놀리아 디어가 추격한 끝에 그의 칼에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진 발렌타인 번은 이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기록되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번이 모반혐의로 붙잡힌 시점은, 기사단에서 점차 명망을 쌓고 활약하던 발렌타인의 이름이 어전에서 자주 언급되며 후계자로서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을 때였다. 우연치고는 기묘하지.
돌로레스는 누군가 꾸민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신전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돌로레스가 관심 하나로 위험한 일에 관여하러 할 때마다 키스 디어가 만류했다. 그가 신전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견제했다.
키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뒤 돌로레스의 신변에 관한 모든 것은 신전이 주도했다. 그리고 둘째 형마저 죽었다. 이번에도 사고였다. 사고는 반복된다. 우연은 없다. 패턴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어의 후계자인 매그놀리아를 찾아왔지만 이대로면 소용 없었다. 부서진 기물을 체스판 위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매그놀리아가 물었다.
"할아버지와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
⠀⠀⠀⠀할아버지의 약속
⠀⠀ 돌로레스, 매그놀리아
────────────
키스 디어의 충성심은 이상했다.
돌로레스는 3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혼인동맹으로나 쓰임을 다하는 남는 자식. 그럼에도 키스는 어렸을 때부터 매그놀리아를 돌로레스에게 붙여놓고 보좌하라고 들들볶았다. 매그놀리아는 내심 병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돌로레스는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아이였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을 달라고 떼를 쓸 때 매그놀리아는 완전히 질렸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했다.
그 부분은 돌로레스도 궁금해했다. 신전의 지지를 받기도 전이었다. 키스가 대답했다.
"젠틸러스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젠틸러스. 혁명에 앞장서서 이름을 날렸으나 후일 모반으로 가주가 처형된 가문. 역사책 한 구석에 적혀 있는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어전을 지키던 기사 가문이었습니다. 그 가주는 폐하께서 왕좌에 오르실 때 함께했던 자입니다. 모반을 일으킬 리 없습니다. 폐하도 아십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키스 디어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없을 때 오히려 가장 많은 감정이 숨어 있기도 했다.
"돌로레스님이 탄생하셨을 때부터 젠틸러스의 수복을 약속받았습니다."
돌로레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수단이라는 것을. 목적을 위한. 배신감은 없었다. 오히려 납득이 갔다. 그래서 충성하는 거구나.
"그래서 수복됐어?"
"아직입니다."
키스 디어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님이 해주지 않으면 내가 할게. 그러니까 젠틸러스가 수복되는 그날까지 곁에 있어줘."
돌로레스의 청에 키스 디어는 기꺼운 마음으로 어린 왕자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봉건제의 서약. 아름답고 오래된 거짓말. 하지만 그건 키스와의 약속이다. 매그놀리아와 무슨 상관인가.
키스와의 일을 알려주며 회상에 잠겨 있던 돌로레스가 쓰게웃었다. 과거는 언제나 씁쓸하다. 그때 매그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거칠게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났다.
깜짝 놀란 돌로레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매그놀리아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젠틸러스는 발렌타인의 성이었다.
기사단에 입단할 때는 양자로 들어가 번이라는 성을 썼지만 본래는 젠틸러스였다. 일전에 발렌타인을 관저로 초대했을 때, 발렌타인이 번의 양자임을 안 키스디어가 원래 성이 뭐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매그놀리아의 옆에서 조금 곤란해하던 발렌타인이 조심스럽게 입에 올린 진짜 가문명을 듣고 키스 디어가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매그놀리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돌로레스는 그의 눈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것을 봤다.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의 눈빛.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발렌타인은 이제 없다는 생각이 매그놀리아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발렌타인은 없다.
디어는 젠틸러스를 두 번 잃었다.
순간 이지로 빛났던 눈이 다시 침잠되어가는 걸 본 돌로레스가 가능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때 발견되었던 발렌타인의 시체 말인데..."
매그놀리아의 몸이 경직됐다. 테이블 건너편에서도 느껴질 만큼. 발렌타인의 시체. 무릎 위에 올려둔 매그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매그놀리아는 천천히 호흡하며 좀처럼 진정되지않는 손을 그러쥐었다. 돌로레스가 마른침을 삼킨 후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켰다.
"애들은 다 내보냈었지만 나는 봤었거든... 귀가 깨끗했었어."
한참 동안 경련하던 매그놀리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얼마쯤 지났을까 매그놀리아가 어렵게 고개를 들어 돌로레스를 쳐다봤다.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어른들은 생전의 발렌타인을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갔었지만, 우리는..."
돌로레스가 말끝을 흐리며 매그놀리아를 바라봤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발렌타인의 귀에 있던 귀걸이를. 그것은 발렌타인이 절벽에서 추락할 때조차 귀밑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그 작은 증표.
물론 그 시체가 발렌타인이 아니라고 해도 본인의 생사를 장담하긴 힘들었다.
그 일이 있고 3년이나 지났고, 등에 부상을 입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성밖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더이상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매그놀리아가 그 약간의 가능성으로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이제 마지막 카드만 꺼내면 될 것 같았다. 돌로레스가 발렌타인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다는 제안으로 딜을 걸려던 그때, 매그놀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의 약속은 아직 유효합니까?"
돌로레스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매그놀리아는 테이블 위의 검을 잡았다. 손에 익은 차갑고 단단한 것. 검은 언제나 약속보다 확실했다.
왕실기사단의 망토자락이 찢어져 흩어져 있었다.
매그놀리아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고작 혼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무너져 내리는 탑의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고 하면 조금 나을까.
발렌타인이 추락한 직후 계곡을 샅샅이 뒤졌을 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때는 매그놀리아는 안심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살아서 도망쳤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안심해버리고 말았다. 안심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위태로운건지 매그놀리아가 미리 알았다면.
키스 디어는 직접 현장에 갔다. 손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대답이 되어 있었다. 처참하다는 것은 이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닐 거라고 키스가 말했지만, 매그놀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고백이 터져 나왔다.
"제가 발렌타인의 등을 쳤습니다."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매그놀리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발렌타인이 괜찮다고 했어요. 계곡이라서, 아래에 강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크게 안 다칠 거라고, 웃으면서..."
키스 디어는 그제야 이해했다. 배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젠틸러스의 아이를 탈출시키기 위해 보낸 손자가 그 아이를 배신한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배신은 없었다. 단지 믿음이 있었을 뿐이다.
"네 탓이..."
"같이 떨어졌어야 했는데."
키스가 말을 끝내기 전에 매그놀리아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떨어졌어야 했는데."
나도. 매그놀리아는 혼절하는 와중에도 후회만을 되풀이했다.
열병 이후의 매그놀리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말수가 줄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 시체. 그렇다. 시체가 가장 가까운 비유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 역설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는 계속되었다. 발렌타인의 등을 친 장면을 추격자들이 목격했기 때문에 디어 가문의 충성심은 의심받지 않았다. 오히려 포상을 받았다. 반역자의 자식을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돌아온 충직한 가문. 서사는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오직 발렌타인만이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매그놀리아는 밤마다 호숫가에 나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처음엔 다들 몽유병이라고 수군댔다. 호수 건너편에 있는 기사단 구역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늦은시간에 돌아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명령했던 돌로레스 보좌도 중단되었다. 손에서 검을 완전히 놓은 매그놀리아는 성을 나가 부지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매그놀리아는 죽음을 연습하는 사람처럼 살았다.
키스 디어가 죽었을 때 딱 한번, 매그놀리아는 국장으로 치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위해 얼굴을 비춘 이후로 일절 왕실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작위 수여식도 마찬가지였다. 수여장은 하인을 통해 전달되었다. 부지는 고요했다. 성기사가문답게 하얗게 빛나던 디어의 저택도 이젠 거의 무덤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돌로레스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다시 검을 잡아."
돌로레스가 오래전에 빼앗았던 검을 내밀었다. 어린시절 매그놀리아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다가, 돌로레스가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넘겨줬던 물건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매그놀리아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빈 잔 같았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네 할아버지와 약속한 게 있거든."
돌로레스는 매그놀리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혀를 찼다.
"근데 지금 네게 말해봤자 의미 없어 보이네."
전장에서 디어의 이름은 전설이었다. 이 불세출의 지휘관은 검을 쥐면 적이 수만대군이어도 부대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손에 펜조차 쥘 수 없음을 돌로레스는 알았다. 눈이 죽어 있다. 하지만 돌로레스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은 억지로라도 손에 검을 쥐어줘야만 했다.
키스 디어가 없는 지금, 신전을 견제할 자가 없었으니까. 돌로레스는 신전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지 못하게됐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적통 후계자인 첫째누나를 지지하던 신전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3남인 돌로레스 지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 뒤집듯이. 어딘가 이상하다는걸 느끼긴 했지만 든든했다. 신전이 뒤에 있다니.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누나가 사고로 죽었다. 사고. 편리한 단어다.
몇 년 후 삼촌인 디아즈 번이 모반죄로 고발되었다. 왕실 적통 후계자 암살 혐의로 증거는 완벽했다. 번은 모반자가 되었고, 그의 양자 발렌타인이 도주했다.
친구였던 매그놀리아 디어가 추격한 끝에 그의 칼에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진 발렌타인 번은 이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기록되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번이 모반혐의로 붙잡힌 시점은, 기사단에서 점차 명망을 쌓고 활약하던 발렌타인의 이름이 어전에서 자주 언급되며 후계자로서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을 때였다. 우연치고는 기묘하지.
돌로레스는 누군가 꾸민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신전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돌로레스가 관심 하나로 위험한 일에 관여하러 할 때마다 키스 디어가 만류했다. 그가 신전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견제했다.
키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뒤 돌로레스의 신변에 관한 모든 것은 신전이 주도했다. 그리고 둘째 형마저 죽었다. 이번에도 사고였다. 사고는 반복된다. 우연은 없다. 패턴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어의 후계자인 매그놀리아를 찾아왔지만 이대로면 소용 없었다. 부서진 기물을 체스판 위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매그놀리아가 물었다.
"할아버지와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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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약속
⠀⠀ 돌로레스, 매그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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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디어의 충성심은 이상했다.
돌로레스는 3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후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혼인동맹으로나 쓰임을 다하는 남는 자식. 그럼에도 키스는 어렸을 때부터 매그놀리아를 돌로레스에게 붙여놓고 보좌하라고 들들볶았다. 매그놀리아는 내심 병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돌로레스는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아이였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검을 달라고 떼를 쓸 때 매그놀리아는 완전히 질렸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했다.
그 부분은 돌로레스도 궁금해했다. 신전의 지지를 받기도 전이었다. 키스가 대답했다.
"젠틸러스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젠틸러스. 혁명에 앞장서서 이름을 날렸으나 후일 모반으로 가주가 처형된 가문. 역사책 한 구석에 적혀 있는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어전을 지키던 기사 가문이었습니다. 그 가주는 폐하께서 왕좌에 오르실 때 함께했던 자입니다. 모반을 일으킬 리 없습니다. 폐하도 아십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키스 디어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없을 때 오히려 가장 많은 감정이 숨어 있기도 했다.
"돌로레스님이 탄생하셨을 때부터 젠틸러스의 수복을 약속받았습니다."
돌로레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수단이라는 것을. 목적을 위한. 배신감은 없었다. 오히려 납득이 갔다. 그래서 충성하는 거구나.
"그래서 수복됐어?"
"아직입니다."
키스 디어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님이 해주지 않으면 내가 할게. 그러니까 젠틸러스가 수복되는 그날까지 곁에 있어줘."
돌로레스의 청에 키스 디어는 기꺼운 마음으로 어린 왕자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봉건제의 서약. 아름답고 오래된 거짓말. 하지만 그건 키스와의 약속이다. 매그놀리아와 무슨 상관인가.
키스와의 일을 알려주며 회상에 잠겨 있던 돌로레스가 쓰게웃었다. 과거는 언제나 씁쓸하다. 그때 매그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거칠게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났다.
깜짝 놀란 돌로레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매그놀리아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젠틸러스는 발렌타인의 성이었다.
기사단에 입단할 때는 양자로 들어가 번이라는 성을 썼지만 본래는 젠틸러스였다. 일전에 발렌타인을 관저로 초대했을 때, 발렌타인이 번의 양자임을 안 키스디어가 원래 성이 뭐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매그놀리아의 옆에서 조금 곤란해하던 발렌타인이 조심스럽게 입에 올린 진짜 가문명을 듣고 키스 디어가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매그놀리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돌로레스는 그의 눈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것을 봤다.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의 눈빛.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발렌타인은 이제 없다는 생각이 매그놀리아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발렌타인은 없다.
디어는 젠틸러스를 두 번 잃었다.
순간 이지로 빛났던 눈이 다시 침잠되어가는 걸 본 돌로레스가 가능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때 발견되었던 발렌타인의 시체 말인데..."
매그놀리아의 몸이 경직됐다. 테이블 건너편에서도 느껴질 만큼. 발렌타인의 시체. 무릎 위에 올려둔 매그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매그놀리아는 천천히 호흡하며 좀처럼 진정되지않는 손을 그러쥐었다. 돌로레스가 마른침을 삼킨 후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켰다.
"애들은 다 내보냈었지만 나는 봤었거든... 귀가 깨끗했었어."
한참 동안 경련하던 매그놀리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얼마쯤 지났을까 매그놀리아가 어렵게 고개를 들어 돌로레스를 쳐다봤다.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어른들은 생전의 발렌타인을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갔었지만, 우리는..."
돌로레스가 말끝을 흐리며 매그놀리아를 바라봤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발렌타인의 귀에 있던 귀걸이를. 그것은 발렌타인이 절벽에서 추락할 때조차 귀밑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그 작은 증표.
물론 그 시체가 발렌타인이 아니라고 해도 본인의 생사를 장담하긴 힘들었다.
그 일이 있고 3년이나 지났고, 등에 부상을 입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성밖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더이상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매그놀리아가 그 약간의 가능성으로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이제 마지막 카드만 꺼내면 될 것 같았다. 돌로레스가 발렌타인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다는 제안으로 딜을 걸려던 그때, 매그놀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의 약속은 아직 유효합니까?"
돌로레스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매그놀리아는 테이블 위의 검을 잡았다. 손에 익은 차갑고 단단한 것. 검은 언제나 약속보다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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