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딜런의 오두막 열쇠를 가진 사람은 딜런 본인 말고는 이자뿐이었다. 이자는 가끔 생각했다. 열쇠가 그저 쇠붙이 조각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누군가 그것을 당신에게만 건네준다면. 그 병단 안에서, 사생활이란 것이 거의 없는 곳에서 말이다.
────────────
⠀⠀⠀⠀⠀⠀⠀ 열쇠
⠀⠀⠀⠀⠀⠀⠀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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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이 살아 있을 때 그는 정보 수집을 위해 자주 외출했지만 두목의 동생이라는 지위 덕분에 전용 거처를 소유하고 있었다. 딜런만 사용하는 공간이었기에 몇 개월씩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감히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은 아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지구본과 천체망원경, 별자리 지도 같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딜런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예전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귀중한 물건들을 망가뜨리곤 해서, 딜런이 출입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었다.
복귀할때마다 이자를 찾았던 딜런은 이전처럼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또래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 이자가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이자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너라면 뭐 괜찮겠지. 아무 때나 와서 시간 보내."
딜런은 열쇠 두 개 중 하나를 이자에게 건넸다.
이자는 아이들이 괴롭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딜런의 무신경한 편애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손바닥에 올려진 열쇠의 무게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딜런이 죽고나서도 여전히 그 거처는 이자만의 공간이었다. 이자도 출입이 잦은 건 아니었지만 종종 찾곤했다. 그곳에서만큼은 마음을 놓고 시간을 보냈다. 그날도 그랬다.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어디선가 술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다. 창문이 열려있었던가, 생각하며 확인하기위해 고개를 든 순간 뒤에서 누군가 끌어안았고 이자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제압했다. 용병으로써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당하는 쪽이 된다.
팔에 목을 걸고 조르려는데 가만보니 피터였다. 취해 있었다. 목에 건 초크를 풀어주자 헤실거리며 들러붙더니 이자의 다리를 부둥켜안고는 허벅지에 얼굴을 비볐다. 이게 미쳤나. 흐느적거리는 꼬라지를 보고 이자가 첫 번째로 한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제보니 피터의 얼굴이 어딘가 딜런을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친삼촌이니까 당연한가. 눈매가 닮았다. 코끝도. 이자는 차마 그를 내치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손이 길 잃은 짐승을 어루만지듯 다정하게 피터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야, 정신 안 차리냐. 술 깨면 후회한다."
딜런이 죽고 난 뒤 피터는 더이상 이자에게 시비를 걸지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게 말을 걸거나 어울리지 않게 안부 따위를 물어댔다. 그 얼간이 짓을 하는걸 매번 무시하던 이자가 한번은 장난하냐고 먼저 빈정댔는데 예전같으면 바로 대거리를 해왔을 자식이, 놀리는거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는 탓에 이자도 아연해졌다. 그런 주제에 거리를 좁히려고 들지도 않아서 이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조금 헤맸다.
피터가 중얼거렸다.
"나도..."
무엇을 나도, 인가했더니.
"키스해 줘."
이자의 머릿속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애매하게 굴더니 결국 술이나 쳐먹고 이런 추태를 부려? 야 차라리 시비를 걸어라! 소리지르고 싶은걸 겨우 삼키며 피터의 멱살을 움켜쥔 이자는 취기에 축쳐진 몸을 일으켜세웠다.
"너 지금 내가 누군지알고 그 소리 하는.. ..."
말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좋게 타이르는걸 때려치우기로 한 이자는 손바닥으로 피터의 따귀를 갈겼다. 두 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달려드는 탓에 미처 피하지못한 이자가 체급차이를 버티지 못하고 간이침대로 함께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입술이 부딪혔나 아구창이 얼얼했다. 하, 씨발. 바로 몸을 일으키려고했는데 피터가 이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자..."
어깨가 축축했다.
"미안해. 미안. 미안, 삼촌..."
떼어내기위해 뒷덜미를 쥐고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오늘은 딜런의 기일이었다. 알고말고. 이자 또한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이곳에 있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이자가 피터를 밀어내는 대신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창 밖으로 기어나갔다.
담배를 태우는 동안 피터가 눈물로 어깨를 적시는걸 내버려두던 이자는 이제 그만하고 나가라는 말과 함께 피터를 떼어냈다. 생각보다 쉽게 떨어지는걸 붙잡고 직접 문까지 끌고 갔다. 피터가 비척거렸다. 여전히 취기에 절어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보낼 기세였던 이자가 돌연 피터의 멱살을 쥔 채 그대로 문짝에 처박았다.
"이번 한 번뿐이야."
선언하며 이자가 피터의 몸에 기대어 입술을 겹쳤다.
잠시 후 입술을 떨어트렸을 때 피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바보같은 얼굴이었다.
"해 달라며. 이걸 원했던 거 아니야?"
이자가 피식 웃으며 문을 걷어찼다. 바로 뒤로 자빠져 나뒹구는 피터를 보고 이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드문 일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피터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자를 멀거니 쳐다봤다. 이자와 닿은 입술이 마치 인두에 닿은 것 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이자는 문앞에 선 채로 그저 쿡쿡 웃기만했다.
그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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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
⠀⠀⠀⠀⠀⠀⠀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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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가 전투에서 발을 크게 다쳤다. 어차피 의무실은 수용인원이 초과된 지가 한참이라 이자의 병상이 딜런의 거처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간호를 위해 사람이 드나들어야 했기때문에 문이 잠기지 않고 개방된 상태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또래 대여섯명이 이 틈을 타 이자의 공간에 침입했고, 부상당한 탓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이자를 돌아가며 강간했다.
공모 한 것은 어렸을때부터 피터와 함께 이자를 괴롭혀왔던 자식들이었다. 질이 안좋은 양아치로 자란 녀석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에겐 이자가 항상 거슬리는 존재였으니까. 딜런이 죽고 피터가 괴롭히는 걸 그만둔 이후로도 불온한 시선이 이자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딜런의 방에는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탐을 낼만한 값진 물건들이 많았다. 다른나라의 금화라던가 고급담배파이프라던가. 딜런은 답지않게 새의 깃털이나 원석목걸이 같은 것도 수집해놨다.
그리고 이자는 그중에서 나이프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눈에 들어온 나이프를 움켜쥔 이자는 제 위로 올라타 욕정을 해소하고 있는 녀석의 배때기에 박아넣었다. 놈은 으윽, 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지만 공교롭게도 사정할 때의 그것과 같아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딜런의 수집품에 정신이 팔린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입을 틀어막은 뒤 복부에 박힌 칼자루를 신중하게 그러잡은 이자는,
그래. 다친건 발이지 손은 멀쩡했다.
이자는 성치 않은 몸으로도 자길 강간한 침입자들을 단 한명도 살려보내지 않았다. 죽이고, 배를 죄다 쑤시고, 갈라놓고.
피터가 딜런의 방에서 뛰쳐나오던 이자와 마주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문 앞의 피터를 확인한 이자가 서두르던 움직임을 멈추고 피터를 빤히 쳐다봤다.
그때와 같은 자리에서 피투성이로 서있는 이자를 보며 피터는, 조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안식처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 온 주정뱅이에게 축객령대신 입을 맞추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자신을 구경하며 문 앞에서 웃던 이자를.
피터는 이자의 손에 들린 피에 젖은 단검이 자신을 해칠지 말지 가늠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이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피터의 무리를 찔러죽이고 나온 터였다. 나이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오두막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피냄새야?"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자의 손을 낚아챈 피터는 소리가 난 곳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자가 다친 발 때문에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피터는 아예 이자를 등에 업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자의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비릿한 피냄새가 역겨웠다.
병단 부지를 벗어나서야 피터는 이자를 내려놓았다.
"추격은... 내가 최대한 막아볼 테니까... 어서 가."
숨을 헐떡이며 피터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이자의 벗은 어깨에 걸쳐줬다. 피로 범벅이 된 몸을 감춰주고 싶었다. 어깨에 걸쳐진 피터의 옷을 잠시 내려다 보던 이자가 물었다.
"알고있었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던건지, 어째서 피투성이가 된 꼴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않고 돕는다는 선택을 할 수 있는건지. 서늘한 기운이 피터의 살갗을 스쳤다. 이자의 손에는 아직 단검이 들려있었다.
피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더니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서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는데 그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곧 잘하는 질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었어."
울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피터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이자는 이 병단에 처음 왔던 그날처럼 감정없는 표정으로 피터를 보고있었다.
"근데, 저녁에 녀석들이 숙소에 없어서, 이상하잖아. 그래서... 설마하고 찾아갔던 거 였어. 네가 무사한지 알고싶어서..."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고개를 푹 숙인 피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이자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추격팀을 꾸렸는지 숲 저편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초조해진 피터가 서둘러 고개를 들자 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않았는데. 텅 빈 자리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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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
⠀⠀⠀⠀⠀⠀⠀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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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이 살아 있을 때 그는 정보 수집을 위해 자주 외출했지만 두목의 동생이라는 지위 덕분에 전용 거처를 소유하고 있었다. 딜런만 사용하는 공간이었기에 몇 개월씩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감히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은 아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지구본과 천체망원경, 별자리 지도 같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딜런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예전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귀중한 물건들을 망가뜨리곤 해서, 딜런이 출입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었다.
복귀할때마다 이자를 찾았던 딜런은 이전처럼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또래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 이자가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이자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기로 결심했다.
"너라면 뭐 괜찮겠지. 아무 때나 와서 시간 보내."
딜런은 열쇠 두 개 중 하나를 이자에게 건넸다.
이자는 아이들이 괴롭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딜런의 무신경한 편애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손바닥에 올려진 열쇠의 무게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딜런이 죽고나서도 여전히 그 거처는 이자만의 공간이었다. 이자도 출입이 잦은 건 아니었지만 종종 찾곤했다. 그곳에서만큼은 마음을 놓고 시간을 보냈다. 그날도 그랬다.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어디선가 술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았다. 창문이 열려있었던가, 생각하며 확인하기위해 고개를 든 순간 뒤에서 누군가 끌어안았고 이자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제압했다. 용병으로써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당하는 쪽이 된다.
팔에 목을 걸고 조르려는데 가만보니 피터였다. 취해 있었다. 목에 건 초크를 풀어주자 헤실거리며 들러붙더니 이자의 다리를 부둥켜안고는 허벅지에 얼굴을 비볐다. 이게 미쳤나. 흐느적거리는 꼬라지를 보고 이자가 첫 번째로 한 생각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제보니 피터의 얼굴이 어딘가 딜런을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친삼촌이니까 당연한가. 눈매가 닮았다. 코끝도. 이자는 차마 그를 내치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손이 길 잃은 짐승을 어루만지듯 다정하게 피터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야, 정신 안 차리냐. 술 깨면 후회한다."
딜런이 죽고 난 뒤 피터는 더이상 이자에게 시비를 걸지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게 말을 걸거나 어울리지 않게 안부 따위를 물어댔다. 그 얼간이 짓을 하는걸 매번 무시하던 이자가 한번은 장난하냐고 먼저 빈정댔는데 예전같으면 바로 대거리를 해왔을 자식이, 놀리는거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는 탓에 이자도 아연해졌다. 그런 주제에 거리를 좁히려고 들지도 않아서 이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조금 헤맸다.
피터가 중얼거렸다.
"나도..."
무엇을 나도, 인가했더니.
"키스해 줘."
이자의 머릿속에서 욕설이 맴돌았다. 애매하게 굴더니 결국 술이나 쳐먹고 이런 추태를 부려? 야 차라리 시비를 걸어라! 소리지르고 싶은걸 겨우 삼키며 피터의 멱살을 움켜쥔 이자는 취기에 축쳐진 몸을 일으켜세웠다.
"너 지금 내가 누군지알고 그 소리 하는.. ..."
말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좋게 타이르는걸 때려치우기로 한 이자는 손바닥으로 피터의 따귀를 갈겼다. 두 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달려드는 탓에 미처 피하지못한 이자가 체급차이를 버티지 못하고 간이침대로 함께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입술이 부딪혔나 아구창이 얼얼했다. 하, 씨발. 바로 몸을 일으키려고했는데 피터가 이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자..."
어깨가 축축했다.
"미안해. 미안. 미안, 삼촌..."
떼어내기위해 뒷덜미를 쥐고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오늘은 딜런의 기일이었다. 알고말고. 이자 또한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이곳에 있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이자가 피터를 밀어내는 대신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창 밖으로 기어나갔다.
담배를 태우는 동안 피터가 눈물로 어깨를 적시는걸 내버려두던 이자는 이제 그만하고 나가라는 말과 함께 피터를 떼어냈다. 생각보다 쉽게 떨어지는걸 붙잡고 직접 문까지 끌고 갔다. 피터가 비척거렸다. 여전히 취기에 절어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보낼 기세였던 이자가 돌연 피터의 멱살을 쥔 채 그대로 문짝에 처박았다.
"이번 한 번뿐이야."
선언하며 이자가 피터의 몸에 기대어 입술을 겹쳤다.
잠시 후 입술을 떨어트렸을 때 피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바보같은 얼굴이었다.
"해 달라며. 이걸 원했던 거 아니야?"
이자가 피식 웃으며 문을 걷어찼다. 바로 뒤로 자빠져 나뒹구는 피터를 보고 이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드문 일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피터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자를 멀거니 쳐다봤다. 이자와 닿은 입술이 마치 인두에 닿은 것 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이자는 문앞에 선 채로 그저 쿡쿡 웃기만했다.
그런 적도 있었다.
────────────
⠀⠀⠀⠀⠀⠀⠀ 열쇠
⠀⠀⠀⠀⠀⠀⠀ 이자
────────────
이자가 전투에서 발을 크게 다쳤다. 어차피 의무실은 수용인원이 초과된 지가 한참이라 이자의 병상이 딜런의 거처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간호를 위해 사람이 드나들어야 했기때문에 문이 잠기지 않고 개방된 상태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또래 대여섯명이 이 틈을 타 이자의 공간에 침입했고, 부상당한 탓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이자를 돌아가며 강간했다.
공모 한 것은 어렸을때부터 피터와 함께 이자를 괴롭혀왔던 자식들이었다. 질이 안좋은 양아치로 자란 녀석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에겐 이자가 항상 거슬리는 존재였으니까. 딜런이 죽고 피터가 괴롭히는 걸 그만둔 이후로도 불온한 시선이 이자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딜런의 방에는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탐을 낼만한 값진 물건들이 많았다. 다른나라의 금화라던가 고급담배파이프라던가. 딜런은 답지않게 새의 깃털이나 원석목걸이 같은 것도 수집해놨다.
그리고 이자는 그중에서 나이프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눈에 들어온 나이프를 움켜쥔 이자는 제 위로 올라타 욕정을 해소하고 있는 녀석의 배때기에 박아넣었다. 놈은 으윽, 하고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지만 공교롭게도 사정할 때의 그것과 같아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딜런의 수집품에 정신이 팔린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입을 틀어막은 뒤 복부에 박힌 칼자루를 신중하게 그러잡은 이자는,
그래. 다친건 발이지 손은 멀쩡했다.
이자는 성치 않은 몸으로도 자길 강간한 침입자들을 단 한명도 살려보내지 않았다. 죽이고, 배를 죄다 쑤시고, 갈라놓고.
피터가 딜런의 방에서 뛰쳐나오던 이자와 마주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문 앞의 피터를 확인한 이자가 서두르던 움직임을 멈추고 피터를 빤히 쳐다봤다.
그때와 같은 자리에서 피투성이로 서있는 이자를 보며 피터는, 조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안식처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 온 주정뱅이에게 축객령대신 입을 맞추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자신을 구경하며 문 앞에서 웃던 이자를.
피터는 이자의 손에 들린 피에 젖은 단검이 자신을 해칠지 말지 가늠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이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피터의 무리를 찔러죽이고 나온 터였다. 나이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오두막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피냄새야?"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자의 손을 낚아챈 피터는 소리가 난 곳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자가 다친 발 때문에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피터는 아예 이자를 등에 업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자의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비릿한 피냄새가 역겨웠다.
병단 부지를 벗어나서야 피터는 이자를 내려놓았다.
"추격은... 내가 최대한 막아볼 테니까... 어서 가."
숨을 헐떡이며 피터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이자의 벗은 어깨에 걸쳐줬다. 피로 범벅이 된 몸을 감춰주고 싶었다. 어깨에 걸쳐진 피터의 옷을 잠시 내려다 보던 이자가 물었다.
"알고있었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던건지, 어째서 피투성이가 된 꼴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않고 돕는다는 선택을 할 수 있는건지. 서늘한 기운이 피터의 살갗을 스쳤다. 이자의 손에는 아직 단검이 들려있었다.
피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더니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서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리는데 그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곧 잘하는 질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었어."
울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피터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이자는 이 병단에 처음 왔던 그날처럼 감정없는 표정으로 피터를 보고있었다.
"근데, 저녁에 녀석들이 숙소에 없어서, 이상하잖아. 그래서... 설마하고 찾아갔던 거 였어. 네가 무사한지 알고싶어서..."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고개를 푹 숙인 피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이자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추격팀을 꾸렸는지 숲 저편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초조해진 피터가 서둘러 고개를 들자 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않았는데. 텅 빈 자리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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