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연인
love is wildfire / 2 / 20251201
단델리온과 돌로레스의 스캔들이 왕실을 강타하며 재상 가문과 맺기로 한 그의 혼담은 허망하게 깨져버렸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앳되고 유려한 미모를 지닌 왕자가 야수 같은 사내의 품에 짓눌려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성안의 공기를 단숨에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었다.

왕실의 거대한 수치라며 당장이라도 단델리온의 목을 치고 용병단을 분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강경론이 득세했다.

사실 슐랑거의 풍토는 젊은이들이 몸을 섞는 일에 그리 큰 무게를 두고있지 않다. 실제로 돌로레스의 약혼자가 이미 수많은 침실을 전전하기로 이름난 난봉꾼이었고 그의 순결치 못한 사생활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법한 이 하룻밤의 정사가 국가적인 소동으로 번진 것은 오로지 비대해진 살라맨더 용병단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신하들의 정치적 야욕 때문이리라. 왕자의 침대 위에서 발견된 단델리온의 이 파렴치한 추문은 눈엣가시 같던 용병단의 명성과 힘을 단숨에 꺾어버릴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단델리온을 처단하려던 그들의 시도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가로막혔다.

​스캔들의 당사자인 돌로레스가 직접 전면에 나서 "그저 술기운에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일 뿐이며, 제 약혼자 또한 이를 관대히 이해해주었다"고 증언하며 단델리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 것이다. 여기에 왕실 내부에서도 단델리온을 노골적으로 감싸고 도는 기류가 형성되면서 사건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왕실은 단델리온의 목을 치는 대신에 징벌적 처사로 살라맨더 용병단을 한미한 신하의 가문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돌로레스는 미리 준비해둔 디어의 군대를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으로 위장시켜서 살라맨더가 속한 신하의 영지를 급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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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연인
⠀⠀매그놀리아×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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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전황은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영지의 주인인 신하는 살라맨더에게 공을 뺏기기 싫다는 듯 텃세를 부렸다.

"안에서 대기나 하고 있으시오. 당신들 같은 천박한 용병들이 나설 자리는 없을 테니."

신하의 사병들은 코웃음을 치며 성문을 나섰지만 매그놀리아가 이끄는 군단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그들이 탈탈 털리는 데에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콧대 높던 신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단델리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거칠게 욕설을 뱉은 이자는 전령서를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꼴사납게 털리고 나서야 도움을 청하다니. 옆에 앉아있던 단델리온이 이를 갈아대는 이자를 향해 진정하라는 듯 웃었다. 전혀 기분나빠하지도, 쫄아붙은 기색도 없었다.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전원 출격한다."

단델리온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병단원들이 호응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고 붉은색 문장이 새겨진 살라맨더의 망토를 두른 용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굶주린 짐승들처럼 거친 기세였다.

한편, 언덕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던 매그놀리아 디어는 적의 증원 보고를 받고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단숨에 밀어버릴까요?"

살기 등등한 부관의 질문에 매그놀리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힘만 빼놔. 전하의 엄명이다. 살려두라고 하셨으니, 절대 목숨은 끊지 마라."

"알겠습니다."

당초 목적이었던 용병단을 밖으로 끌어냈으니, 이 정도 규모의 전장은 부하들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자신이 검을 뽑을 일도 없으리라고 매그놀리아는 생각했다.

다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돌로레스의 의도가 여전히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스캔들을 일으키고, 자신의 군단까지 움직이게 만들면서 노리는 것이 고작 변방의 용병단 하나라니. 왕자는 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해왔기에 이번에도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을 터였다.

​자신이 잘 모르는 전투 분야에 대해서는 입을 대지 않던 이가 이번에는 직접 출전해 지휘하라는 말까지 했다.

매그놀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돌로레스는 '반드시 포로로 잡아야 할 사람'이 있으니 직접 출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니 돌로레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아마 보면 바로 알 거라며 얼버무렸다.

​돌로레스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곧 끝날 전투다. 일단 제압하고 모두 포로로 잡으면 된다. 그때 가서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황은 매그놀리아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군단장님! 전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후방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매그놀리아는 다급하게 달려온 부관의 보고에 잠깐이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대륙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디어의 부대가 고전할 리가 없었다.

"상대는 용병들이다. 봐주면서 싸우라고 했지 누가 지라고 했나?"

"그게... 적의 선봉에 선 자들의 무력이 상식을 벗어났습니다. 특히 한 놈이..."

매그놀리아는 혀를 차며 직접 말에 올랐다.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기사단의 진형이 거친 야수같은 용병들의 기세에 찢겨나가고 있었다. 매그놀리아는 흙먼지를 뚫고 전장의 중심부로 말을 몰았다.

그곳에서 아군을 압도하고 있는 한 명의 용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검은 망설임이 없었다. 찌르고, 베고, 흘려내는 동작 하나하나가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투박한 용병의 것이기보다는 오랜 시간 정교하게 조련된 고위 기사의 검술이었다. 검을 쥐는 손목의 각도,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는 발의 디딤새, 상체를 틀어 공격을 흘려내는 유려한 곡선...

매그놀리아는 홀린 듯 말고삐를 당겼다.

"길을 열어라!"

군단장의 외침에 부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장의 한가운데로 질주한 매그놀리아는 검을 세워 예의 용병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쇳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서로의 팔로 전해지는 팽팽한 힘의 균형. 검신을 타고 흐르는 진동. 발렌타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낯설지 않았다. 아니, 기묘할 정도로 익숙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상대와 합을 겨뤄온 것 같은 감각.

누구지? 어디서 본 놈인가? 어디선가 만났다면 발렌타인이 기억하지 못할리 없었다. 특히나 이런 사치스런 백금의 갑옷은 피가 튀기는 전장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몇 번의 치열한 공방 끝에 발렌타인이 쥐고있던 검을 놓쳤고, 곧바로 매그놀리아의 검 끝이 발렌타인의 투구 끈을 끊어냈다.

발렌타인의 투구가 바닥에 뒹굴며 감춰져 있던 길게 땋은 금발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콧잔등에 걸린 안경 너머로 당황과 살기가 뒤섞인 얼굴이 드러났다. 문득 매그놀리아의 시선이 그의 귓가에 멈췄다. 그 귀걸이는 분명 낯익은 물건이었다.

그것이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 순간, 매그놀리아는 그만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년동안, 연인을 제 손으로 직접 등을 쳐서 절벽으로 떠나보낸 것에 대한 후회로 미쳐갔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존재가 지금 살아서 숨을 쉬며 눈앞에 서 있다는 믿기 힘든 광경에 넋을 놓고있던 매그놀리아는 비척거리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전장의 적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살의나 적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매그놀리아의 눈에서는 지독한 갈망과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깊은 애절함이 읽혔다.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른 채, 위기감을 느낀 발렌타인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어어, 잠깐—"

발렌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쥐고있던 육중한 검을 손에서 떨어트린 매그놀리아가 짐승처럼 달려들어 거친 손으로 발렌타인의 뺨과 턱을 감싸 쥐었고,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전장의 시간이 멈췄다.

매그놀리아 디어의 부하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군단장, 전장에서 한 번도 자비를 베푼 적 없는 냉혈한인 그가 지금 적의 용병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무기도 손에서 놓친 상대였기때문에 바로 목을 칠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살라맨더의 용병들도 넋이 나가긴 마찬가지였다.

발렌타인은 혼란스러웠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덮쳐온 것은 당황스러울 만치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전장의 흙먼지와 피 냄새가 뒤엉킨 공기 사이로 상대의 젖은 숨이 입안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베이는 고통 대신 느껴지는 이 생경한 감각에 발렌타인은 굳어버렸다.

"읍! 으윽!"

발렌타인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를 휘어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고 혀를 섞어오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잡아먹을 듯한 상대의 기세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오금이 떨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감각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발렌타인은 무릎을 세워 상대의 허벅지 안쪽을 강타했다.

"윽!"

곧이어 그러쥔 주먹을 매그놀리아의 얼굴에 갈긴 발렌타인은 그 반동으로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안경이 벗겨져 시야가 흐릿해졌다.

"하아... 하... 미친..."

미친놈.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발렌타인이 악을 썼다.

"당신, 미쳤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상대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밀려났던 매그놀리는 타격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다가왔다. 입가에 피가 맺혔음에도 그는 웃는 듯, 우는 듯한 기괴한 표정으로 발렌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느껴지는 상대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발렌타인은 주저앉은 채로 조금씩 물러났다. 문득 손 끝에 서늘한 금속이 닿았다. 아까 날아갔던 자신의 검이었다.

이 미친놈은 반드시 죽인다.

발렌타인은 기회를 노리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남자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며 다가온 순간, 번개같이 검을 추켜세워 상대의 목을 겨눴다.

"발렌타인."

검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지독하게 다정했다. 그 음성이 귓가에 닿는 순간 발렌타인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걸 느꼈다. 남자는 목 앞에 서슬 퍼런 칼날이 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직 발렌타인의 눈동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무장 해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발렌타인의 손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발렌타인."

다시 한번 불리는 이름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혼란스러움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발렌타인을 보며 매그놀리아가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발렌타인 젠틸러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그 말에 발렌타인의 뇌리에 낯익은 울림이 스쳤다. 머릿속을 찌르는 통증이 일었지만 그 통증은 이내 알 수 없는 짜증으로 뒤바뀌었다.

"아니, 몰라! 네가 누군데!"

발렌타인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소리친 순간 매그놀리아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깊은 상실감이 스치는 그 틈을 타고 주변에 대기하던 매그놀리아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제압해!"

"젠장, 이거 놔!"

순식간에 팔이 꺾이고 바닥에 짓눌렸다.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발렌타인은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려고 했다.

"그냥... 닮은 얼굴이었던 건가..."

매그놀리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발렌타인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세상 전부를 잃은 사람의 그것처럼 공허하고 간절했다. 바닥에 처박힌 채 그 시선을 받아내던 발렌타인은 욕설 뒤로 낯선 통증을 삼켰다. 저 얼굴이 무엇이기에 가슴 안쪽이 이토록 욱신거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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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연인
⠀⠀매그놀리아×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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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왜 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응접실에 들어선 돌로레스가 매그놀리아를 보자마자 던진 첫마디였다.

'보면 알 것'이라며 일전에 자신이 특정해 두었던 포로를 확보했다는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내심 기대가 컸다. 발렌타인이 살라맨더 용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언질조차 주지 않고 전장에서 맞닥뜨리게 한 건 돌로레스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선물이었다.

하지만 소파에 앉은 매그놀리아의 얼굴은 마치 초상집에 온 사람마냥 어두웠다.

어전에서 발렌타인의 생존을 확인하고 자신조차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는데, 매그놀리아는 기이할 정도로 가라앉아 보였다. 발렌타인을 잃고 죽어 지내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누구보다 발렌타인을 그리워했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돌로레스는 솟구치는 의문을 찻물과 함께 삼켰다. 입을 다문 매그놀리아에게 대답을 강요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로레스의 예상대로 한참을 침묵하던 매그놀리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잘못 찾았습니다.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뭐?"

뜻밖의 대답에 돌로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짧은 침묵 끝에 매그놀리아가 전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고 정황을 전해 들은 돌로레스는 난감하다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지, 다짜고짜 입을 맞춘 건 좀... 너답지 않았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관자놀이를 더듬은 돌로레스가 가늘게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귀걸이를 하고 있었잖아."

"같은 모양으로 세공된 것일 수도... 일단 본인이 아니라고도 했고, 정말 저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매그놀리아에게서 납득할 만한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돌로레스의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왕실기사단을 거쳐 간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매그놀리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긴했다. 하지만 저런 외모에 예의 귀걸이까지 한 사내가 발렌타인 본인이 아니라는 것 역시 말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등의 상처는 확인했어?"

"아니라는데 굳이 확인할 필요는,"

"저런 외모가 흔하다고 생각해?"

"..."

"누가 봐도 머리만 길고 안경만 쓴 발렌타인이잖아."

"모를 일이지."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은 그저 말대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돌로레스는 매그놀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사람인가 보네. 잘못 찾았네... 그렇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만이 달그락거렸다. 이내 돌로레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포로로 삼았는데 그 김에 침실에 불러서 재미 좀 보지 그랬어? 첫사랑과 헷갈릴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라서, 전장에서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출 정도로 열렬한데."

침묵하는 매그놀리아를 앞에 두고 비꼬는 투로 힐난하던 돌로레스는 너무나 인위적인 손짓으로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가렸다.

"아아, 짐이 실언을 했군. 매그놀리아 경은 불능이었지."

비웃는 얼굴이 천사같이 나긋했다.

"하긴 지금 감옥에 있는 게 발렌타인 본인이라고 해도 전처럼 밤을 함께 보내기는 어렵겠네. 그래서 굳이 침실로 안 부른 거라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 아, 근데 그거, 발렌타인이 넣는 쪽이면 상관없는 거 아니야?"

"짜증이 난 건 알겠지만..."

"그래. 내게 이런 모욕을 듣기 전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야지, 매그놀리아 디어."

돌로레스의 말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 손을 쓰는 게 번거로우면 감옥에서 병정을 시켜서 벗겨내든가. 어차피 찢어내면 천 조각일 거,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돌로레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운 채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화를 내고 있었다. 몇 년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폐인처럼 살더니 이제 와 본인을 앞에 두고 미적지근하게 구는 매그놀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 발렌타인이라면..."

매그놀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치욕을 주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지 않아. 살아있다는 것만 알았으니... 됐습니다."

됐다니, 누구맘대로. 돌로레스가 턱을 괴며 매그놀리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무언가를 가늠해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매그놀리아 경. 미리 그와 말을 맞춰둔 게 있나?"

여기서 돌로레스는 다른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매그놀리아를 향해 돌로레스가 다시금 선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혹시 나한테는 이렇게 말해 놓고 뒤로는 이미 결탁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거 맞아."

"차라리 그랬으면..."

매그놀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부관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매그놀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관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보고했다.

"군단장님, 방금 지하 감옥에 침입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포로를 구출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장에서 체포해서 감방에 수감해두었습니다."

찻잔을 든 돌로레스의 손이 멈추고 짧은 침묵이 응접실을 메웠다. 돌로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매그놀리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돌로레스의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이제 어떻게 할건지 묻는 듯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낸 매그놀리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에게 지시했다.

"알겠다. 지금 왕자 전하를 모시고 그쪽으로 갈테니 지하실에 전해라."
"예, 군단장님."

부관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물러난 뒤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매그놀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돌로레스를 향해 말했다.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보는 게 좋을 테니."

매그놀리아가 먼저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찻잔이 탁자에 내려앉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돌로레스는 낮게 한숨을 흘리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마른 흙내음과 차가운 쇠 냄새만이 감도는 복도 끝의 철창 너머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매그놀리아와 돌로레스가 감옥 앞에 당도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발렌타인이었다.

"히익!"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매그놀리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기겁하며 자리에서 펄쩍 뛴 발렌타인은 잽싸게 옆에 있던 이자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다 좋지만, 문제는 발렌타인의 덩치가 이자보다 크다는 점이었다.

발렌타인은 그 커다란 몸을 어떻게든 이자의 등 뒤에 숨겨보겠다고 잔뜩 웅크리고 몸을 접었다. 빠져나온 어깨와 긴 다리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물론 이자는 개의치 않았다. 자기보다 한뼘은 더 큰 발렌타인을 지키겠다는 듯 앞을 막아서며 매그놀리아를 향해 맹수처럼 흉흉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전장의 중앙에서 '그 사단'이 났을 때 이자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도주로를 확보하고 함정을 제거하느라 전장 외곽을 돌고 있었기때문에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 그대로 발렌타인을 포함한 동료 여럿이 포로로 잡혀갔고, 이자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전황이 정리된 후였다. 대강의 정황을 들은 이자는 그날 밤 단독으로 감옥에 잠입했다.

감옥을 지키는 놈이 있다면 처리하고 자물쇠를 따서 동료들을 구출하면된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철창을 살짝 열어두고 보초병과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발렌타인은 그림자처럼 숨어들어온 이자를 발견하자마자 카드를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발렌타인이 왈칵 울면서 안겨오는 바람에 전투 태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멈칫거리던 이자는 결국 보초병의 인도로 발렌타인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늘 이런 식이지... 어느정도 예상한 부분이라 이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발렌타인은 항상 문제 그 자체였기때문에. 그런 그를 데리러 오면서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이라는 전제를 세운 것부터가 애초에 틀려먹은 생각이었다. 그래, 젠장. 나도 알고 있다고. 아무튼 이자는 감옥에 갇히고나서야 발렌타인에게서 직접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발렌타인이 횡설수설하느라 빼먹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미친놈이 갑자기 입술을 들이박았다니까! 혀를 막, 으으!"

발렌타인은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진저리를 치는 건 잊지않은 주제에 정작 매그놀리아가 자신을 '발렌타인 젠틸러스'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전장에서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키스를 당한 충격이 너무 커서 뇌가 그 부분을 휘발시켜 버린 탓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자는 분개했다. 아마 발렌타인이 멋대로 생략시킨 얘기까지 들었더라면, 이자도 매그놀리아를 단순히 변태로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내막을 모르는 돌로레스는 과할 정도로 적대적인 감옥 안의 풍경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혹시 나한테 말한 거 말고도 또 잘못한 거 있어?"

매그놀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홀린 듯이 발렌타인만 보고 있었다.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는 해도 내심 죽었다고 생각하고 체념했었다. 지금도 그저 꿈같았다. 방금 전 돌로레스에게는 타인일 것이라 단정 지으며 포기하려 했던 자신이 무색하게도 막상 다시 눈앞에 마주하니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발렌타인과 함께 자랐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안경이라든가 머리를 길렀다든가 하는 건 예상 외였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매그놀리아의 눈빛이 하도 진득하고 애틋하다 보니 둘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던 이자조차 기분이 묘해졌다.

들은 것만큼 그렇게 엄청 개새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살면서 수많은 개새끼들을 겪어온 이자였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매그놀리아의 눈에 깃든 건 욕정이나 가학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문득, 자신이 감상적으로 굴고있다는 생각에 이자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이자는 저 남자가 단순히 발렌타인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는걸 이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등 뒤의 발렌타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매그놀리아를 피하고 싶어 하는데 어쩌겠는가. 이자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경계 태세를 풀지 않고 매그놀리아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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